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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달맞이꽃 -1-

2017. 2. 22. 23:41 | Posted by 아뮤엘

“좋아하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관심 없다.”


꽤 단호한 거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는 익숙해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들고 있던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곤 내일보자며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혀가 아릴정도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인한 피로감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처리하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서류더미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뻐근한 몸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어주었다. 시계를 보니 4시가 조금 지나가는 시각이었다. 


서류도 다 제출하고 승인까지 받았겠다, 다른 일도 없으니 조금 이르지만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고 겉옷을 걸쳤다.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지갑까지 챙기고 방문을 나서자 조노비치의 얼굴이 보였다.


“벌써 퇴근 하는 거야?”

“설마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런 일로 찾아온 거 아니니 걱정마. 그렇지 않아도 일찍 퇴근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온건데 전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서 말하려던 참이라고 대충 둘러대며, 방문을 잠갔다. 내일 보자며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시작은 그래, 별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전날 연이은 야근을 배려하듯, 일찍 끝난 업무에 알과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단골 식당에 들렸다 나오는 길, 오랜만에 별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사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상쾌한 바람과 함께 별들이 맞이해주었다. 오랜만의 휴식인데다가,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생도시절이야기, 회사에서 있었던 일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어느새 늘어난 술병들로 인해(집에서 술을 더 가지고 올라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알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렉스. 혹시라도 이 긴 전쟁이 끝난다면, 뭘 할 예정인가?”

“흐음... 글쎄다? 만약,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모든 걸 내려놓고 긴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이라... 여행도 좋지, 그래.”


들고 있던 잔을 내용물을 비우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 잔에 남은 술을 따라 마셨다. 별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날따라 술은 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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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Ricardo

2016. 11. 18. 00:12 | Posted by 아뮤엘

눈이 내린다.

너를 닮은 새하얀 눈이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색색의 건물들은 새하얗게 물들어가고 크고 작게 들리던 소리도 하나둘 가려져 갔다.


11월 17일

너와 내가 만난 날.

처음으로 이름을 가지게 된 날.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생긴 날.

처음으로 친구라는 존재가 생긴 날.

너와의 긴 인연이 시작된 날.


뽀득-

걸을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왠지 정겨웠다. 생각해보니 생일에 눈이 내리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그리운 추억들….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래 마피아에 거두어지기 전까지는 언제나 둘이 함께였다. 그러다 우리를 눈여겨본 그들에게 거두어지고 나서는 조직 원들이 축하해 주었다. 너는 언제나 따로 방을 찾아와 생일을 축하한다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날은 너와 같이 잠을 자는 날이었다. 뭐 이건 네 생일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더 크고 나서는 카포로서의 일이 바빠 서로의 생일을 챙기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다른 이들의 축하는 필요 없었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바빠도 조금 늦은 시각이라도 서로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런 날 중에서도 눈이 내리는 생일은 언제나 특별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모든 일을 미루어두고, 약속이라도 한 듯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그리고 너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에서 밥을 먹고, 너의 집에서 와인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너에게 우리는 이미 끝난 연일 텐데, 나는 눈이 내린다는 이유로 하던 일을 내려놓고 집을 나섰다. 큰길을 벗어나 좁고 좁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고 나서야 작은 공터가 나왔다. 버려진 옷가지와 벽돌 따위로 만들어진 작은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거리에 버려져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던 우리가 살았던. 둘이서 살 집이니 바람이나 비에 무너지면 안 된다고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녀 재료를 주워와 공들여 만들었었다. 겨우 만든 집은 며칠 살지도 못한 채,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우리는 옛 추억을 그리듯 종종 이곳을 찾았다. 지금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은 집이지만 예전이 그리워져 몸을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집 안에는 색색의 조약돌과 쓰레기만이 남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것들도 있는걸 보면 집을 잃은 고양이가 가끔 쉬어가는 쉼터가 된 모양이었다. 씁쓸해지는 마음을 삼키고, 커지는 하얀 눈송이에 근처 건물 아래로 들어가 눈을 피했다. 네가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미련이 이곳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으니까, 춥지 않으니까 좀 더 기다려 볼까? 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새하얗던 세상이 어둠에 잠식될 때까지 너를 기다렸다. 


 드문드문 들려오던 소리와 건물의 불빛이 하나둘 사라져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추위에 굳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굳은 몸을 간단히 풀고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왔다. 어두워진 거리에는 흐릿하게 빛나는 가로등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정말 떠나버린 거구나. 아릿해져만 오는 가슴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나를 거부한다고 하여도 난 널 지켜야 했다. 그 어둠으로부터. 그게 날 구원해준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답이었기에. 다만, 이 아파지는 마음을 난 어찌하면 좋은 걸까? 떨구어진 머리가 초라해진 나의 그림자를 더 작게 만들었다. 눈 위로 툭툭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고요한 거리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뽀득- 뽀드득-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익숙한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손길을 따라 옮긴 시선 끝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네가 있었다.


“여전히 미련하군. 포기라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유를 묻는건가? 그렇다면 답해주지. 생일 축하한다, 리키”


제 품에 안긴 그의 따뜻한 온기를 나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게 꿈은 아닐까? 네가 혹시나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리고 그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아아,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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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에 긴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안심되었던 것일까? 지독한 악몽은 찾아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어가는 시각, 쓱 방을 둘러보니 메이드가 두고 간 것인지, 간단한 아침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배가고파오긴 했지만, 뻐근한 몸을 풀고 싶었기에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물에서 몸을 풀고 있자니 배가 고파 결국 아침 식사를 욕조에서 먹고 말았다. 몸도 풀고, 고픈 배도 채우니 일석이조였지만, 그 모습을 유모에게 들켜 혼이 나고 말았다. 30분가량 혼이 났을까? 그제야 본 목적이 떠올랐는지, 유모는 빨리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가라는 말을 전하고 방을 나섰다. 물론 나서면서 다시는 욕실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하지 말라 단단히 일렀다. 유모에게는 일단 알겠다고 답을 하고 방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단순한 와이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집무실로 가는 길, 주방에 들려 아침 식사가 놓여있던 그릇을 반납했다. 점심은 조금 늦게 먹고 싶다고 주방장에게 이르고 도착한 집무실에는 작은 형과 큰 형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오랜만에 만나는 형들은 반가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뒤이어 들어온,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인물이 그 대화를 막았다.


“호오, 그 작던 아이들이 많이도 컸구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숙부님.”

“…….”

“…….”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는지 뒤룩뒤룩 찐 손을 내미는 숙부를 보며 큰형은 사무적으로 인사를 나눴지만, 작은 형은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고 나는 그대로 쇼파에 앉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작은 형처럼 자리를 박차 나가고 싶었지만, 이 인간이 왜 왔나 궁금해 자리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와 말을 섞을 생각은 없었기에 집사가 가져온 차를 따라 마셨다. 그런 우리의 태도에 숙부는 기분이 상했는지 빠득 이를 갈았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 작던 삼 형제가 많이 컸군. 무가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윗사람에 대한 예절은 더 배워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타계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혼란스러워 그런 것이니 ‘어른’이신 숙부님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끌끌. 그래, 어른인 내가 이해해야지.”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꺼운 손으로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숙부는 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건, 나와 다른 분가들의 의견을 담은 제안이다.”


큰형은 봉투에 든 종이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접어 봉투에 다시 넣어 숙부 앞에 놓았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집사, 숙부님이 돌아가신다고 하는군. 배웅해드리도록.”

“네놈! 그러고도 네가 내 도움 없이, 이 가문을 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마차 떠나면 소금 좀 뿌리는 것도 잊지 말고!”

“이글, 말이 지나치다.”


얼굴을 붉힌 채, 역정을 내는 숙부를 끌고 나가는 집사에게 말을 덧붙였다. 한숨을 내쉬는 형과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숙부를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빈 잔에 차를 따랐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액체를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샘이 마르고, 억지로 참은 탓에 목이 감겼을 무렵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


 축축해진 소매가 거치적거려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닦았다. 눈가가 불게 물든 채 부어올라 천이 스칠 때마다 아파왔다. 몸도, 마음도 걸레 조각이 되었기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일찍 잘까? 침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 올린 물건은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그 와중에 놓지도 않고 들고 온 자신이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나중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기장을 비밀 서랍장에 넣었다.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사이 시트를 정리한 것인지 뽀송뽀송한 촉감의 이불이 자신을 반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다 깨는 것의 반복을 통해 지쳐 무척이나 얕은 잠에 빠졌다. 주변이 무척이나 고요했기에 그 고요하던 공기가 불청객으로 인해 흐트러졌다. 누굴까? 궁금했지만, 감긴 두 눈꺼풀이 무거워 뜰 수가 없었다. 눈꺼풀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그냥 누워있길 선택했다. 사실 자신에게 적의가 없어 보이는 것이 제일 컸다.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은 불청객은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굳은살로 인해 거칠지만, 무척이나 따뜻한 손길. 나는 이 손길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일로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냥 방으로 가서 쉬지. 가슴 한편이 불편해져 잠결인 척 돌아누웠다. 그런 제 맘을 아는 것인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무책임했구나. 미안하다.”

형이 왜 사과하고 있는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다정한 손길에 이끌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조금만 버텨다오. 곧 마무리될 터이니. 모든 일이 끝나면 셋이서…….”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전해지지 않은 채 어둠에 잠식되었다.

독백

2016. 11. 1. 00:18 | Posted by 아뮤엘

이유도 없이 버림받고 배척받던 삶.

어느 날,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부모.

홀로 집에 남아,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나날.

가장 처음 손길은 나를 아낀다고 하지만,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삶에서 가장 풍족했지만 외로웠던 시절, 나는 천사와 만났다.

가장 불행했던 아이가 행복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신은 나를 싫어하는지, 그 작은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천사의 몸이 투명해졌다 돌아오는 장면을 보았다.

역시 나를 받아줘서 저주라도 받은 것일까?

불안해지는 마음에 하루에도 수십번 곁에 있어 줄 거냐고 물었다.

천사는 웃으며 당연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둠이 태양을 집어삼키고 하늘에서 슬픔을 표현하던 날

나를 처음 받아준 천사는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단 한 사람뿐.


“그 어느 세계에 가도 당신은 없었지.”


공통점이라면, 그래 무술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는 당신이 남기고 간 일기장과 서류 등을 통해 당신에 대해 잘 알았거든.”


가장 사랑스러운 당신이 보고 싶어서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보이지 않아. 그래서 본보기로 세계를 멸망시켰어.”


세계를 넘어갈 때마다,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는 저 위의 존재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그랬더니 보내주더라고. 당신이 있는, 아니 존재했던 세계에.”


당신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기 전, 머나먼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당신은 이미 없는 존재라서, 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거야.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서”


그러니 다시 만나러 와줄 거지?

사랑하는 나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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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문의 기둥이었던 두 분이 없다. 그 사실만으로 모두가 힘들어했다. 큰형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업무와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이른 나이에 즉위하게 된 부담감 때문일까?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이 많다며 최소한의 식사, 수면 시간 등을 제외하고서는 집무실과 서재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작은 형은 방문을 잠그고 자신을 가뒀다. 방 앞에 음식과 형이 원한 물품들이 담긴 트레이를 놓으면 빈 접시와 필요 물품이 적힌 종이를 놓는 것으로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하였다. 형들이 걱정되어 찾아가 봤다. 한눈에 봐도 수척해진 큰형은 자신에게 괜찮냐고 물어왔고 작은 형은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칼들이 연주하는 레퀴엠에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막내 도련님은 괜찮으십니까? 집사장이 물었다. 나는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지. 하루에도 수십, 아니 수백 번은 생각한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부모님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신다는 걸 막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 가족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들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후회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잠시 눈을 붙이면 악몽이 찾아왔다. 꿈은 항상 똑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숲을 뛰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살기 위해 뛰고 또 뛴다. 하지만 길의 끝은 보이지 않고 결국 지쳐 어둠에 먹히는 것으로 끝났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불쾌하기보단 그저 두려웠다. 형들도 부모님처럼 사라져서 혼자 남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에 몸을 끌어안았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축축해진 시트와 옷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토스트를 입에 물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앉아 남은 음식을 먹으며 머리를 말렸다. 짧은 머리라 그런지 식사를 끝마쳤을 무렵에는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다 먹었으니 움직여볼까?”


식기들을 트레이에 옮겨 그대로 끌고 나갔다. 1층 식당에 도착하니, 도련님~하고 부르며 집사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생겼나? 트레이를 근처에 있던 메이드에게 부탁하고 집사장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걷고, 또 걸어서 저택에서 살았던 자신이 처음보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따라 간 곳에는 커다란 문이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 곳에는 역대 조상들의 얼굴이 맞이하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니 초상화뿐만이 아니라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들도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그 사람을 나타냈던 물건들을 같이 전시한 것 같았다. 호기심이 발동해 방 안을 둘러보는데 집사가 헛기침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제야 이곳에 온 목적이 궁금해졌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왜냐면 이곳이 만약 역대 가주와 그의 부인의 초상화와 물품이 있는 곳이라면 이곳에 없는 것이 있었으니까. 자기 생각이 적중했는지 집사는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자신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보통이라면 큰형이, 큰형이 바쁘다면 작은형이 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지금은 두 형이 모두 힘든 상태였다. 큰형은 일 때문에 바쁘고 작은 형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나마 괜찮은 내가 부모님의 물품을 정리하여 이곳에 초상화와 함께 보관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다행히 초상화는 생전에 그려놓은 것이 있어 그것을 놓기로 하였지만, 문제는 부모님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되물어 봤지만, 답은 없었다. 그래 이렇게 끙끙 앓으며 피하느니 차라리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나을테지란 생각에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일손이 비는 집사와 메이드를 불렀다.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부모님의 방과 집무실 등으로 나눠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일단 부모님의 방을 들려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형들과 찾아온 방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검을 배우면서 발걸음을 멈춘 곳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방보다는 어머니가 아끼시던 정원이나, 서재에서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며칠 사이 뽀얗게 먼지가 내린 방안을 보며 가슴이 저려왔다. 가만히 서 있으면,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어머니가 아끼던 보석함, 아버지가 아끼시던 술들, 그리고 어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일기장…. 주류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던 술만 전시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큰형에게 보냈다. 보석함은 통째로 보관하기로 하였고 일기장은 내가 따로 챙겼다.


 하나, 둘 저택 곳곳에 남겨진 부모님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추려낸 물건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방을 나섰다. 뒤따라오던 집사장이 말했다. 무리할 필요 없다고. 그 속에 품은 뜻을 잘 알기에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미소로 답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평소와 같이 소리를 내 웃어 보이고 싶어도 미소를 짓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괜찮지 않구나, 나. 풀리는 다리, 자꾸만 힘이 빠지는 신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흘리듯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방을 향해 달렸다. 다른 이들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푸른 빛이 도는 은백색의 아름다운 꽃

이 꽃은 처음 가문을 세운 조상께서 사랑했다는 여인이 묻힌 자리에서 피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슬피 우는 그가 안쓰러웠는지 새벽이슬을 머금고 핀 꽃은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저택으로 돌아가 일단 휴식을 취하자는 다른 이들의 말에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며 꽃잎이 상할까 조심스레 채집해온 꽃은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사라져버린 꽃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에게 찰나의 행복을 보여준 이 꽃에게 가문의 이름을 따 '홀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보는 자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이 꽃은 생김새도, 피어나는 장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이야기만 전해져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유모에게 자주 들었던 꽃의 전설은 어린 자신과 형들에게 호기심 대상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떠한 행복을 가져다줄까?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른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라며 쓴웃음을 지으셨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기에 어른들도 아직 못 봤나 봐! 하고 넘겼지만 16살이 되던 해 왜 어른들이 그러셨는지 알게 되었다. 대가 없는 행복은 없는 법, 그래 언제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였다. 왜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항상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오랜만에 바쁘신 부모님과 형들이랑 외출하게 되었다. 가족에게 소홀히 해서 미안하다며 아버지가 시간을 내셔서 바닷가에 있는 별장에 놀러 가게 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함께 놀러 간다는 사실 하나로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산책이나 할까…?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켜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연못 가까이에 다다랐을 무렵, 달빛에 비쳐 은은하게 빛나는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기가 감도는, 달빛으로 인해 아름답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사라질듯한 분위기.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꽃이 이야기에만 나오던 그 꽃일 거라는 것을. 가져가 보았자 사라질 게 뻔했기에 제자리에서 소원을 빌었다. 행복한 여행길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별 탈 없이 다녀올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의 소원에 답이라도 하듯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꽃을 보고 작게 미소를 답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잠자리로 향하였다.


 꽃이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가족끼리 간 여행에서의 일정은 사고 없이 즐겁게 마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형들과 먼저 저택으로 돌아왔다. 잠시 들릴 곳만 들려 바로 따라오신다던 부모님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별일 아닐 것이 분명하니 기다려보자는 큰형의 말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형들도 걱정에 푹 잠을 자질 못했는지 수척한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식당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새하얗게 질려 달려오는 집사의 표정에 우리는 직감했다.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집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이제는 부모님과는 만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돌려 말하고 있지만, 그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작스러운 산사태가 마차를 덮쳐 그대로 파묻혔다고 한다. 주변의 인력들을 끌어다 흙을 파헤쳐 보니, 부모님은 안 계시고 부모님의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만 발견되었다고 말하였다.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살아계실 확률도 있다며 작은 형과 나는 열심히 부모님의 생사를 주장했다. 큰형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견에 동의하는지 재수색을 요청하였다. 끈질기게 물고 매달렸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서 부모님이 곁에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매달렸다. 돌아가셨을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였다. 그래, 그 강하던 부모님이 고작 산사태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결국, 수색 일주일 만에 흙투성이가 된 부모님을 찾을 수 있었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부모님의 모습에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죽음을…. 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사망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산사태로 인한 사고사가 두 분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 두 분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필요한 의식들을 잘라내고 이틀에 걸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몇몇 가문의 가주들과 지인들을 불러 간략하게 식을 치렀다. 뭐 간략하게 치른다고 하였지만, 알리진 않았어도 어디서 알고 온 건지 쥐새끼처럼 찾아온 방계혈족이 찾아와 식이 너무 단출하다, 형님이 위에서 화를 내시겠다, 이래서 어린 애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따위의 소음을 지껄였다. 쫓아내고, 쫓아내도 어디로 들어오는 것인지 결국 초대했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모든 이들을 저택에서 내보내고 나서야 겨우 조용해졌다. 어둠이 찾아올 새 없이 화목하고 웃음이 넘쳤던 예전과 달리 무거운 어둠이 지배하는 저택에는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루드이작/루드작] Erlösung -2-

2016. 10. 27. 00:23 | Posted by 아뮤엘

 [절망 속에서 내밀어진 작은 손은 무척이나 눈부셨다. 바닥으로, 아니 그보다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만 하던 나날이 즐거워졌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쫓겨 다녔다. 이유는 모른다. 어머니조차 그를 외면했지만, 그의 자식이라는, 가족이라는 꼬리표는 항상 우리를 따라다녔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지만, 꼬리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책임지지도 못할 씨앗들을 뿌려 놓은 덕에 우리 가족은 언제나 가난했다. 남의 집 일을 하느라 얼굴조차 보기 힘든 어머니,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낡은 집은 더러워졌고 냄새까지 나기 시작했다. 첫째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 가끔 물을 길어 강가에 나갈 때면 돌을 던지는 아이들, 숙덕거리는 마을 사람들로 인해 아주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각에 나갈 수 있었다.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상황이. 나는 더럽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매일 이렇게 상처가 나도록 몸을 닦고 닦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며 배척하고, 돌을 던졌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나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존재인데 왜 나만? 그 설움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동생들 앞에서는 울 수는 없었다. 그래, 몸에 밴 습관들은 나를 끝까지 죄어왔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좁고 어두운 곳을 찾아 작은 몸을 숨기고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렸다.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새어나가는 울음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얼굴을 무릎에 품고 최대한 소리를 죽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자꾸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근처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에게 들키면 성가셔지니까, 재빨리 눈물을 닦고 도망치자는 생각에 대충 눈가를 소매로 잡고 일어섰지만, 자신을 붙잡는 손길이 더 빨랐다.


“천사님, 여기서 왜 울고 있어?”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사? 누굴 보고 하는 소리지? 설마 나인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붙잡힌 손을 빼내어 도망치려고 했지만, 제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남자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응? 대답 좀 해주지, 그래?”


아, 얼굴도 다시 보고 싶네~ 라고 덧붙이며 말을 걸어왔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나를, 피하지 않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도망가야 된다는 생각보다 상대가 누구인지 보고 싶어졌다. 그래, 왜인지 몰라도 가슴 한구석에서 그라면 믿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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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이작/루드작] Erlösung -1-

2016. 10. 25. 01:19 | Posted by 아뮤엘

 [내가 이 지독한 꿈에서 깼을 때, 잘 잤어? 라고 말하는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 십 번을 해. 이 모든 것이 꿈이고 사실은 둘이서 태양과 달이 잘 보이는 언덕 위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를 잠식하고 있는 불쾌한 기억의 시작은, 그래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된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 아주 어린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일 모든 일의 시작을 따지자면, 자신을 찾아온 한 무리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그러니 세상을 위해 자신들에게 맡겨달라고 말했다. 불길한 느낌이 드셨는지, 아버지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 방문자들을 잠시 문밖으로 쫓아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돈과 식량을 챙겨주고, 마룻바닥의 숨겨진 통로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멀리 도망가라고, 자신은 여기서 그들을 막을 테니, 아니, 곧 따라갈 터이니 걱정 말고 먼저 가라고 웃어 보이며 어머니와 자신을 차례로 포옹하고 그대로 통로의 문을 닫았다. 아버지도 곧 따라오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어렸던 나도 알았던 것 같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란 걸.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피해 도착한 마을에서 우리는 쉴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독일이 아닌 체코의 한 마을이었다. 마을의 한쪽은 강으로, 다른 한쪽은 숲이 있어 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어머니도, 나도 꽤 오랜 도망생활에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이만하면 추적자들도 포기했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사는 것도 좋았겠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다행히 숲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집이 있었다. 버려졌다? 라기에는 생각보다 깔끔한 집이었기에, 주위에서 나뭇가지와 흙을 주워다 부족한 부분만 수리하였다. 하루만 잔다고 한다면 그냥 자도 되겠지만, 살아야 했기에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옆에서 어머니를 도우다 마을로 내려가 필요한 식재료를 사 오는 것이 다였다. (다행히 마을에 오가는 사람은 많았는지 외지인에 대한 배척은 없었다) 가끔 입이 가벼운 상인들에게 얻는 정보도 있었기에 하루에 한 번씩은 마을로 내려갔다. 이것저것 얻은 정보는 많으나 보통 쓸모없는 내용이 다수였지만 유용한 정보도 다수 있었다. 예를 들면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집이 원래 살던 주인이 수도로 올라가면서 버렸다던가, 신흥종교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사실 정확한 의미 모를 이야기도 많았지만 귀담아들어 두었다 집으로 가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께 말씀드리곤 했다. 그럼 어머니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셨다.


 마을에서의 삶이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열매를 구분하여 딸 수 있게 되었다. 트랩을 만드는 것에도 능숙해져(마을 사람에게 배웠다.) 작은 짐승을 잡아와 요리해 먹기도 했다. 가끔은 어머니와 같이 강가에 가서 물놀이하다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어머니가 빨래하실 때면 마을 중앙 분수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이날도 평범할 것 없는 날이었다. 빨래하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분수대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끔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평범하게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오길 바라며, 앉아있는데 저 멀리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어 넘어갔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때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그날따라 그 작은 소음이 무척 신경 쓰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찾아간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는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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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로라드렉 2/14일 합작

2016. 1. 19. 19:41 | Posted by 아뮤엘

 너와 나의 관계는 언제나 그랬다. 그래,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처럼 타인이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연인의 모습을 우리는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물어봤다. 너희 둘 이러다 결혼하는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냐며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그의 미래엔 내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뭐 같은 일이었기에 떠올리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우리는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서로 같은 성별을 가진 이들의 사랑이라서? 주변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여서?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저 둘만의 시간을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했으니까. 불쾌하다.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머리 아프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더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두통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몰려오는 수마에 기대 생각의 늪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 깊은 어둠 속에 잠식되었다.


 눈을 뜨니 벽에 걸린 시계가 흐릿하게 보였다.

“11시...20분?”

아...망했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빌어먹을 회사라던가, 일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회사에 단 한 번도 지각을 해본 적도, 일을 게을리 한 적도 없는 저였기에 지금 이 상황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지각도 지각이지만 늦잠이라니? 눈을 비비고 다시 시계를 쳐다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 준비해서 씻고 회사를 간다 한들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오늘 별다른 일정도 없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불마녀의 잔소리도 잔소리지만, 그저 밖을 거닐고 싶었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하였다. 간단하게 씻을까 순간 고민을 했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도 그렇고 그냥 씻고 싶었다. 머리 위로 흐르는 찬물을 하염없이 맞고 있었다. 이러면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이 다 흘러 사라지지 않을까?

“...실없는 소리...”

차가워진 몸을 수건으로 닦고 욕실을 나서니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난 뒤라 그런지 고파오는 배를 안고 부엌으로 향하였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텅 비어있었다. 요 며칠 야근 때문에 밥 먹을 시간이 없었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다니... 생각해보니 욕실에 샴푸나, 휴지 같은 것들도 떨어져 있던 것이 떠올랐다. 집안일에 무심했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지만, 항상 도맡아 하던 이가 있었기에 딱히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아... 미치겠네.”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필요한 물품들을 종이에 적었다. 혹시 빼먹는 것이 있나 몇 번씩 확인하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사야 할 물품이 많았기에 다 들고 올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게 늘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마켓에 도착했다. 바구니를 들고 마켓 안으로 들어가자 신선함을 뽐내는 채소와 과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신선함에 이끌려 살까? 순간 고민했지만,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유통기간이 긴 통조림 따위를 주로 사고 신선한 과일 조금과 야채를 구매하였다. 이미 먹을거리로 가득 찬 바구니를 점원에게 부탁해 계산대에 맡겨놓고, 새 바구니를 들고 생활용품이 있는 곳으로 가 필요한 것들을 담았다. 필요한 것만 산다고 샀음에도 묵직해진 바구니를 보며 연구용품은 나중에 사기로 하고 돌아가는 길 베이커리에 들려 샌드위치와 바게트를 추가로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온 짐을 정리하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괜스레 그가 떠올랐다. 이번 출장지는 동양이라던데, 입맛이 까다로운 녀석이라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걱정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알아서 하고 돌아오겠지 라며 별생각 들지 않았는데 몸이 약해진 탓인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짜증났다. 샌드위치를 입에 털어 넣고 소파에 기대듯 누웠다.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가 떠올랐으니까,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혼자가 익숙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 무서웠던 걸지도 모른다. 마음을 주면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을 배신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자신을 바꾸어 놓았다. 그와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항상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어느새 빠져버렸다. 감추었던 감정들을 하나둘 일깨웠다. 조금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은 너라는 존재에게 침식당해 물들고 말았다. 이제 나라는 존재에게는 네가 전부인데,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어떡하면 좋지? 나는 네가 직접 표현해줬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날 너의 연인이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너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었는지 눈을 뜨니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 어슴푸레한 빛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굳은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불을 켜니 5시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보였다.

“으음... 어림잡아 10시간 정도 잔 건가?”

평소라면 운동을 하러 갔을 시간이지만, 어제 회사를 무단으로 결석한 것 때문에 쌓여있을 업무가 떠올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기로 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였다. 어제저녁을 먹지 않고 자서 그런지 평소보다 허기진 상태였기에 든든하게 먹을 생각이었다. 과일을 잘 씻은 다음 먹기 좋게 자르고, 딱딱해진 바게트에 마늘과 버터, 설탕을 섞은 소스를 발라 오븐에 살짝 구웠다. 소시지와 달걀까지 요리해 식탁 위에 올려놓으니 평소와 달리 풍성해 보였다. 요리하는 동안 내려진 커피를 곁들여 아침 식사를 하니 6시가 되었다. 그릇들을 깨끗이 설거지한 뒤,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말린 뒤, 평소대로 머리를 세팅하고 제복을 꺼내 입었다. 옷에 주름이 있는지 확인한 뒤, 서류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잘 정돈된 거리를 따라 걸으며 올려다본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다만 문제는...

“무단결근에 대한 처벌인가..?”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마녀도 마녀지만, 크루그먼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무거워지는 발을 겨우 이끌고 회사에 도착하였다. 빠르게 사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어둠이 감도는 사무실에 불을 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깨끗한 자신의 책상이었다. 무단결근을 했으니 어제 분의 서류가 쌓여있어야 정상인데, 왜? 자신에게 누군가가 설명해줬으면 좋겠지만, 사무실에는 그 궁금증을 풀어줄 이가 없었다. 일단 계속 서 있는 것보다 자리에 앉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개인 물품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여니 곱게 접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종이를 꺼내 펼치자 안에는 낯익은 필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아파서 쉰다고 설명했으니 걱정 마시길.’ 크루그먼인가. 어제 못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일찍 왔더니, 크루그먼의 배려로 할 것이 없다니. 나중에 고맙다고 술 한 잔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출근 시간이 되었는지 하나둘 늘어가는 목소리에 기지개를 켜니 주변에서 자신을 봤는지 괜찮냐는 질문이 날라왔다. 이제 괜찮으니 신경 끄라는 대답을 해주고 하나둘 올라오는 서류를 처리하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흘렀다. 쌓여가는 서류에 욕을 날리다가 불마녀에게 잔소리 듣고, 돌아가는 길 크루그먼과 홀든을 끌고 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 네가 없는 옆자리를 그리워하기도 하며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 초콜릿 향에 머리가 아파졌을 무렵이었다. 꼬마 아가씨가 선물이라며 주는 상자를 가방에 넣는데, 홀든이 어떤 여성이 자신을 밖에서 찾고 있다며 나가보라고 말했다. 자신을 찾아올 여성이 있던가? 가문과 관련된 사람이겠거니 하고 나갔더니 모르는 여성이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말하며 자신의 팔을 이끌었다. 여성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였고, 더군다나 장소가 회사였기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녀를 따라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서자 점원은 창가 쪽으로 안내하였다.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자신에게 무엇을 마시겠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괜찮다고 답하였다. 알겠다며 커피 두 잔을 내달라고 점원에게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오늘은 야근확정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데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베르토 씨와 친하시다고 들었어요.”

“...엉?”

“같이 동거를 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사실인데, 그게 아가씨랑 무슨 관련이 있지?

“저는 머지않은 미래에 그의 여자가 될 사람이거든요.”

당당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한 여인의 모습에 허탈해졌다. 그 녀석도 한 가문의 장자이니 약혼녀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그 녀석과의 관계에 대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고민이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애소설 속 상황이 재현될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결국 그 녀석이 입이 아닌 타인의 입으로 이별을 통보받는 것인가? 기분 참 더럽네. 살짝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자신의 모습에 확신을 얻은 것인지 여자는 말을 이었다.

“그에게 전해 듣지 못했나요? 다가오는 봄에 그와 결혼을 할 예정이거든요.”

“......”

“이제 전쟁놀이는 그만두고 그도 가업에 집중해야 하니까 회사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제 생각엔 당신이 걸림돌인 것 같아서 말이죠. 우리 그이에게서 떨어져 주시겠어요?”

“하아, 그래. 내가 떨어진다고 하면 얼마를 줄 예정이지?”“이 정도면 당신 복 받은 줄 아세요. 서민한테 이렇게까지 돈을 주는 거 흔치 않거든요.”

“서민? 내가 아무리 가문에서 제명당했다고 그렇지, 서민이라.”

“네?”

여인이 전해준 봉투에는 꽤 큰 금액이 적힌 수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금액 말인데, 내가 가진 재산의 1/10도 안 되는데 어쩌지? 저기 아가씨 소설을 많이 읽었나 본데 상대를 봐가면서 써야지. 예쁜 얼굴도 아닌데 머리도 나빠서 어쩜 좋아, 응?”

“ㅁ..무슨! 제가 누군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거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평소보다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인물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알베르토 씨! 저기 저 남자가!”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네? 얼마 전에 파티에서 뵈었는데...”

“아, 그것보다 레이디가 왜 여기에 이 사람과 같이 있는지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남편이 될 사람의 주변 잡초는 정리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누가 레이디의 남편입니까? 적어도 저와 그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하아? 무슨 소ㄹ”

“저는 이미 평생을 함께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레이디는 아닌 것 같군요.”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그의 말에 여성은 일어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꾹 다물고 울먹이는 여성을 보고 있자니 알이 제 팔을 이끌었다.

“야, 알? 잠시만 야!!”

“뭔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출장은 어쩌고?”

그를 본 것은 좋았지만 분명 다음 주쯤 도착한다던 그가 벌써 돌아오다니.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지금쯤이면 이곳으로 오는 배에 있는 것이 정상인데.

“아, 어느 여행자에게 도움을 받아 빨리 돌아올 수 있었네.”

“일은?”

“어제 보고도 다 했다네. 가장 먼저 자네를 보고 싶었지만, 자네가 회사에 없더군.”

“...집에 오면 되잖아.”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었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도착한 곳은 집이었다. 회사에 갔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과 쏟아질 잔소리에 대해 걱정을 하며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전보다 살짝 길어진 머리에 자신의 걱정대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는지 살이 빠져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출장 많이 힘들었냐?”

“가서 고민했네. 자네가 우리의 관계에 지루해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

“나는 두려웠네. 앞을 나가는 순간 변할 것들이.”

그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여행자가 그러더군. 변화를 두려워하는 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다만, 그것을 이겨내느냐 아니면 계속 두려워하느냐의 차이라고.”

이어 자신의 왼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몇 날 며칠을 생각해보았지만,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자네를 잃는 것이었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상자 속의 물건을 꺼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지에 끼웠다.

“나와 평생을 함께해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