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 거실에는 새하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언제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피아노는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다. 그래, 자신이 아는 한, 그와 알아온 그 긴 시간 동안 피아노는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가끔 피아노가 망가지지 않도록 그가 직접 조율하였다. 소중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공들여 조율을 하고 난 뒤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를 쓰다듬다 이내 제 시선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머리를 살짝 누르고 연구실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그의 시선을 항상 사로잡는 그 피아노가 얄미워 그가 잠시 외출하러 나간 사이 건반을 덮고 있는 덮개를 한쪽으로 치우고 뚜껑을 열었다. 그가 피아노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기에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매일 깨끗하게 피아노를 닦기 때문에 티클 없이 새하얀 건반이 나열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과 달리 가운데 부분의 건반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 잉크가 떨어졌었나? 평소 피아노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그가 했을 리는 없고…. 잉크가 아닌 무언간가? 솟구치는 호기심에 연분홍빛 건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익은 냄새가 제 코끝을 스쳤다. 비릿한 냄새. 옅지만 이 냄새가 자신이 익숙히 아는 그것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인가?"
“…. 누구 멋대로 피아노에 손대래!!"
자신을 거칠게 밀쳐내는 손길에 바닥에 엉덩방아 찧고 말았다. 둔부를 타고 올라오는 가벼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올려다본 렉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자신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온 그가 오늘따라 얄밉기도 했지만,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일을 몰래 하다 걸렸으니 자신의 잘못이 컸다.
"미ㅇ..."
"...됐고 물건 덜 사온 거 같으니까 가서 사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알겠다고 말하며 지갑과 겉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그는 작게 어깨를 떨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문을 닫고 한 계단 두 계단 내려오다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우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그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필요할 때만 말을 걸어왔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와 같이 보낸 수년간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생도 시절 밖에서 온 연락에 급히 뛰어갔던 그가 늦은 밤 붉게 물든 눈으로 들어왔던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폭풍전야처럼 느슨한 듯, 팽팽하게 지속되던 분위기는 집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그는 그대로 특유의 벽을 치고 있었기에 사무실 내의 공기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빨리 일을 하라고 소리쳤을 조노비치양도 첫날 렉스에게 잔소리를 한 뒤, 재촉을 포기하였다. 평소라면 장난치듯 짜증을 내며 답했을 그와 달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반응에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다른 동료들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르겠다고 모르는 척 대답하는 것밖에는...
분위기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고 결국 조노비치양이 폭발하였다.
“당신,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거 다른 사람에게 피해인 건 알고 있지?”
“......”
“불만이 있으면 당사자랑 해결을 보던가 왜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해?”
“아, 그래? 미안”
“하,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
“그럼 지금 여기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풀려? 그리고 이럴 시간에 네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 지금 말 ㄷ...”
“미안하네, 조노비치양.”
그녀의 손에 작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서야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렉스를 자리에서 끌어내었다. 아니 끌어내려고 하였다.
“뭔데? 네가 왜 사과를 해?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냐?”
자신의 손을 단호하게 쳐내는 그의 손길에 멈칫하였지만, 그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조노비치양 말대로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기에 주변에 큰 피해를 주었고 렉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깨닫는 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시발, 야. 안 놔?"
잡힌 손목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를 애써 외면하고 옥상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장소를 벗어나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까? 그가 할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말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등이 얽혀 정작 하고 싶었던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목적지였던 옥상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찼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는 렉스와 자신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겠다, 그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새끼... 힘만 세서 붓게 생겼네.”
렉스는 자신이 잡았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은 손을 숨겼다.
“미안...하네. 많이 부었나?”
“네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뭐냐, 날 데리고 나온 이유가?” 평소라면, 아니 예전 같았으면 네놈 때문에 죽겠다며 대신 일 하라고 말해왔을 그인데 선을 긋는 그의 모습에 망설여졌다. 괜찮은 걸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지?
“뭐야? 보아하니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인데, 생각이 정리되면 말하던가.”
근처 벤치에 앉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목에 걸린 십자가를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네.”
“뭐가 미안한 건데? 네가 딱히 미안해할 게 있던가?”“자네의 상처를 건드린 것도, 자네를 울린 것도, 그리고 자네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모두 미안하네.”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도망쳤냐?”숙인 고개 사이로 꾹 다문 입술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 자네가 더 힘들어할까 봐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으로 피하려고 했네.”
“하, 평소엔 그렇게 용감하고 눈치 없는 놈이?”“상처받은 자네에게 내가 다가감으로써 더 큰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씨발. 진짜, 좆같게.”
그는 붉게 부어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작게 흔들리는 어깨와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가 울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어깨를, 무너져 내린 그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며 다독여주었다. 그래, 다시는 그를 울리지 않겠다고 맞닿은 체온에 맹세하였다.
그 날 이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실의 분위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잔소리하는 조노비치양과 그걸 장난스럽게 넘어가는 렉스,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전보다 더 활기차진 것 같았다. 회사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렉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 같았으면 서로 피하고 모르는 척 넘어갔을 것들을 서로 감싸주게 되었다. 지난 일로 서로 오해를 하고 상처받고 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크루그먼의 배려로 일찍 퇴근하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고 쉬기 위해 소파 앉아있는데 렉스가 양주를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건넸다. 한 잔, 두 잔 말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라왔다. 눈앞이 흐릿해져 갈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도 취해있는 상태라 띄엄띄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상심에 빠져있던 그를 도와준 알비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생도 시절 휴일마다 빠져나가 만난 사람 또한 그 알비라는 남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병이 있었는데 그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숨기는 것이 없냐고 물어왔지만, 이미 그에게 다 말해주었기에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싱겁다는 듯 투정을 부리다 이내 제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저 피아노가 알비라는 사람의 것이었다는 것과 생도 시절 렉스가 급하게 외출했던 것이 그와 연결되어있다는 것 등 알비라는 사람이 드렉슬러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었다. 분하지만, 이미 멀리 떠난 이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신이 렉스 안에서 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지 말이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 피아노는 저렇게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았기에 새하얀 피아노는 장식용으로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선을 그어놓은 듯 그 선을 넘어가려고 하면 그는 자신을 거부하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완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계절은 흘러 푸르던 나뭇잎들이 화려한 치장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회사에서 긴 야근 주간이 끝난 기념으로 오랜만에 그와 같이 요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집에 있는 식재료로 미리 준비하기로 하고 자신은 필요한 물품을 장보기로 하였다. 자주 가는 가게에 들려 종이에 적혀있는 식재료들을 사고 나서는데 점원이 서비스라며 사탕이 들어있는 작은 병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안 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단골손님 서비스라는 그녀의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렉스가 기다리고 있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맛있는 냄새가 제 코를 자극하였다. 재료만 손질한다더니 결국 요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품에 안은 식재료들을 안고 부엌으로 향하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고 있던 식재료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육수를 내는 그의 뒤로 가 꼭 끌어안았다.
“왔냐?”
“아아, 무슨 요리를 하려고 육수를 내고 있는 건가?”
“네가 파에야 먹고 싶다며, 싫으면 하지 말까?”
“싫을 리가 있나.”
“그럼 육수 좀 보고 있어. 나는 네가 사온 재료 좀 다듬으련다.”
제 품에서 벗어나 식재료가 담긴 봉투 쪽으로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육수가 잘 우러났는지 확인을 하고 야채를 볶기 위해 팬에 기름을 두르는데 렉스가 무언가를 들고 제 쪽으로 다가왔다.
“야, 이건 뭐냐?”“아아, 그거. 가게 점원이 단골 선물이라며 주더군. 사탕 같던데 자네 피곤할 때 먹으면 좋지 않을까?”
“흐음.. 한 번 먹어볼까?”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자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렉스는 사탕하나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입에 넣었다.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내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무진장 달다. 너 못 먹겠는데?”
“달지 않은 사탕이 어딨나?”
“이건 꼬맹이들이 즐겨 먹는 것보다 더 단데? 어, 이거 사탕 안에 시럽 같은 것도 들어있네?”
“그 정도인가? 그것보다 시럽이라니 신기하군.”
사탕 안에 시럽이 들어있다며 신기하다고 하나 더 꺼내먹는 렉스를 보다 하나 먹어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으나, 꼬마 아가씨들이 즐겨 먹던 사탕의 단맛을 떠올리니 맛보려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맛있게 먹는 렉스를 보니 굳이 먹을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육수도 다 우러났고 야채를 볶는 과정도 끝났기 때문에 가스 불을 끄고 빈 그릇에 옮기는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큰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놀라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니 렉스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머리가 굳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풀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잡아 전화기를 잡았다. 주치의의 번호를 떠올리며 번호를 입력하였다. 제발... 빨리 전화를 받길.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는 주치의에게 렉스의 상태를 설명하니 그는 최대한 빨리 갈 테니 도착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렉스를 똑바로 눕히고서 주치의가 말한 대로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괜찮을 거라고 주치의가 와서 그를 살려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치의는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놓아주라고, 그는 이미 떠났다고. 외면하고 싶었다. 감긴 두 눈이 장난이었다는 듯 자신이 좋아하던 푸른빛을 다시 한 번 빛내며 자신을 담길 바랐다. 차갑게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그를 나는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