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달렸을까? 기차를 타고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실 자신이 가려는 곳은 이 역에서도 차를 타고 한~두 시간은 더 가야 있는 장소였다. 짐을 들고 역 앞 광장에서 마차를 탔다. 멍하니 창문을 열고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항상 긴장을 놓을 새 없이 싸우고 죽이는 생활의 연속이었기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유로운 일상이 오히려 어색했다. 푸르름을 뽐내는 나무들 사이로 새파란 바다가 보였다.
아아, 벌써 도착인가? 마차가 멈추고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마부에게 고맙다고 팁까지 쥐여주고 일단 묵을 장소부터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행객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장소는 아니었는지, 마을에 여관이 있었다. 여관에 들어가 방을 얻어 짐을 내려놓은 뒤, 바닷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의 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파도치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도시를 떠나 바다로 왔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평소 입던 정장 대신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반소매에 반바지, 거기다 바닷가에 나간다고 하니 여관 주인이 신으라고 건네준 슬리퍼까지. 완전 피서객의 모습이었다. 모래사장을 걸을 때마다 신발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의 촉감이 좋아 결국 신발을 벗어 손에 들었다. 찬 바닷바람과 달리 따뜻한 모래. 마음이 차분해졌다. 길게 늘어진 해변가를 따라 걷다 보니 저 멀리 절벽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꽤 많이 걸어온 것 같았다. 해가 저물기까지 그리 머지않아 슬슬 되돌아가야 하지만, 절벽까지 멀어 보이지 않아 절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곳에서의 짧은 휴식이 끝나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천천히 생각을 되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을 거리라는 걸 잘 알기에 더더욱 지금 이 시간이 소중했다.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하아...”
피 냄샌가... 또 분쟁이... 지긋지긋하군.
“또 어느 조직ㅇ....”
자연스럽게 뒤돌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감았던 눈을 뜨니 매우 평화로운 석양이 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자신이 휴가를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피 냄새는 어디서…? 희미한 냄새를 따라간 곳은 절벽 아래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위가 가득한 곳이었다. 파도와 바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각각의 모양을 지닌 바위 사이로 새하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꽤 검은색의 고급 진 재질의 옷, 그리고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몸을 뒤집었다. 새하얗게 질려서 그렇지 꽤나 미형이었기에 여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을 손에서 빼내었다. 이도류인가? 검을 남자의 허리에 달린 검집에 넣고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맞닿은 피부로 느껴지는 상대방의 체온은 상당히 내려간 상태였고 복부에 입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상태였다. 상처가 그리 깊은 편은 아니었으나, 상태를 보아하니 상처를 입고 방치된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았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쳐갔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입고 있던 셔츠를 찢어 상처 부위를 감아 조심스레 안아 들고 마을을 향해 달렸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마을에 있는 의원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를 치료한 의사는 출혈량이 많고, 체온이 낮아진 상태라 쇼크 현상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수혈도 잘되었고, 상처도 잘 봉합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에게 감사하다고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평소라면 죽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왜일까? 조금씩 체온이 돌아오기 시작했는지 파랗게 질려있던 입술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새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 여인네들이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바르는 붉은 립스틱이 그려내는 것보다 더 매혹적이었다. 아름답다. 이 감은 눈 속에는 무엇을 담고 있을까? 남자가 그려내는 음은 어떠할까?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왜 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자신의 손길을 느낀 것인지 작게 뒤척이는 남자의 행동에 살짝 손을 떼어내었다.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 이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모자라 검을 그냥 검집에 넣었지만, 그리 내버려두면 검이 상할 게 뻔하였다. 남자가 일어날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의사에게 부탁하여 천을 얻어왔다. 얼핏 봤었지만, 전투한 모양인지 검에는 바닷물에 어느 정도 닦이긴 했지만, 피가 묻어 있었다. 두 검을 닦아내니, 꽤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검을 검집에 넣어 탁자 위에 다시 올려놓으려는데 빛에 반사된 검집에 새겨진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벨..져..인가?”
“...ㅇ.....”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인지 작게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줄곧 감겨있던 눈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아이스 블루색의 눈동자. 아아, 빨라지는 심박수를 느끼며 언젠가 피에르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것이 저리 호들갑 떨 정도로 좋은 건가?’
‘리키, 너도 언젠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알게 되겠지. 누군가를 바라만 봐도 설레고, 그 사람이 계속 생각나는 감정을’
아아,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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