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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달맞이꽃 -1-

2017. 2. 22. 23:41 | Posted by 아뮤엘

“좋아하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관심 없다.”


꽤 단호한 거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는 익숙해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들고 있던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곤 내일보자며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혀가 아릴정도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인한 피로감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처리하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서류더미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뻐근한 몸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어주었다. 시계를 보니 4시가 조금 지나가는 시각이었다. 


서류도 다 제출하고 승인까지 받았겠다, 다른 일도 없으니 조금 이르지만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고 겉옷을 걸쳤다.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지갑까지 챙기고 방문을 나서자 조노비치의 얼굴이 보였다.


“벌써 퇴근 하는 거야?”

“설마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런 일로 찾아온 거 아니니 걱정마. 그렇지 않아도 일찍 퇴근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온건데 전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서 말하려던 참이라고 대충 둘러대며, 방문을 잠갔다. 내일 보자며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시작은 그래, 별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전날 연이은 야근을 배려하듯, 일찍 끝난 업무에 알과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단골 식당에 들렸다 나오는 길, 오랜만에 별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사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상쾌한 바람과 함께 별들이 맞이해주었다. 오랜만의 휴식인데다가,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생도시절이야기, 회사에서 있었던 일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어느새 늘어난 술병들로 인해(집에서 술을 더 가지고 올라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알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렉스. 혹시라도 이 긴 전쟁이 끝난다면, 뭘 할 예정인가?”

“흐음... 글쎄다? 만약,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모든 걸 내려놓고 긴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이라... 여행도 좋지, 그래.”


들고 있던 잔을 내용물을 비우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 잔에 남은 술을 따라 마셨다. 별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날따라 술은 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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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Piano -1-

2015. 12. 28. 23:58 | Posted by 아뮤엘

 그의 집 거실에는 새하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언제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피아노는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다. 그래, 자신이 아는 한, 그와 알아온 그 긴 시간 동안 피아노는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가끔 피아노가 망가지지 않도록 그가 직접 조율하였다. 소중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공들여 조율을 하고 난 뒤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를 쓰다듬다 이내 제 시선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머리를 살짝 누르고 연구실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그의 시선을 항상 사로잡는 그 피아노가 얄미워 그가 잠시 외출하러 나간 사이 건반을 덮고 있는 덮개를 한쪽으로 치우고 뚜껑을 열었다. 그가 피아노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기에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매일 깨끗하게 피아노를 닦기 때문에 티클 없이 새하얀 건반이 나열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과 달리 가운데 부분의 건반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 잉크가 떨어졌었나? 평소 피아노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그가 했을 리는 없고…. 잉크가 아닌 무언간가? 솟구치는 호기심에 연분홍빛 건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익은 냄새가 제 코끝을 스쳤다. 비릿한 냄새. 옅지만 이 냄새가 자신이 익숙히 아는 그것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인가?"

“…. 누구 멋대로 피아노에 손대래!!"

자신을 거칠게 밀쳐내는 손길에 바닥에 엉덩방아 찧고 말았다. 둔부를 타고 올라오는 가벼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올려다본 렉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자신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온 그가 오늘따라 얄밉기도 했지만,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일을 몰래 하다 걸렸으니 자신의 잘못이 컸다.

"미ㅇ..."

"...됐고 물건 덜 사온 거 같으니까 가서 사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알겠다고 말하며 지갑과 겉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그는 작게 어깨를 떨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문을 닫고 한 계단 두 계단 내려오다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우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그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필요할 때만 말을 걸어왔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와 같이 보낸 수년간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생도 시절 밖에서 온 연락에 급히 뛰어갔던 그가 늦은 밤 붉게 물든 눈으로 들어왔던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폭풍전야처럼 느슨한 듯, 팽팽하게 지속되던 분위기는 집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그는 그대로 특유의 벽을 치고 있었기에 사무실 내의 공기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빨리 일을 하라고 소리쳤을 조노비치양도 첫날 렉스에게 잔소리를 한 뒤, 재촉을 포기하였다. 평소라면 장난치듯 짜증을 내며 답했을 그와 달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반응에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다른 동료들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르겠다고 모르는 척 대답하는 것밖에는...


 분위기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고 결국 조노비치양이 폭발하였다.

“당신,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거 다른 사람에게 피해인 건 알고 있지?”

“......”

“불만이 있으면 당사자랑 해결을 보던가 왜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해?”

“아, 그래? 미안”

“하,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

“그럼 지금 여기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풀려? 그리고 이럴 시간에 네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 지금 말 ㄷ...”

“미안하네, 조노비치양.”

그녀의 손에 작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서야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렉스를 자리에서 끌어내었다. 아니 끌어내려고 하였다.

“뭔데? 네가 왜 사과를 해?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냐?”

자신의 손을 단호하게 쳐내는 그의 손길에 멈칫하였지만, 그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조노비치양 말대로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기에 주변에 큰 피해를 주었고 렉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깨닫는 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시발, 야. 안 놔?"

잡힌 손목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를 애써 외면하고 옥상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장소를 벗어나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까? 그가 할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말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등이 얽혀 정작 하고 싶었던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목적지였던 옥상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찼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는 렉스와 자신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겠다, 그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새끼... 힘만 세서 붓게 생겼네.”

렉스는 자신이 잡았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은 손을 숨겼다.

“미안...하네. 많이 부었나?”

“네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뭐냐, 날 데리고 나온 이유가?” 평소라면, 아니 예전 같았으면 네놈 때문에 죽겠다며 대신 일 하라고 말해왔을 그인데 선을 긋는 그의 모습에 망설여졌다. 괜찮은 걸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지?

“뭐야? 보아하니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인데, 생각이 정리되면 말하던가.”

근처 벤치에 앉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목에 걸린 십자가를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네.”

“뭐가 미안한 건데? 네가 딱히 미안해할 게 있던가?”“자네의 상처를 건드린 것도, 자네를 울린 것도, 그리고 자네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모두 미안하네.”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도망쳤냐?”숙인 고개 사이로 꾹 다문 입술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 자네가 더 힘들어할까 봐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으로 피하려고 했네.”

“하, 평소엔 그렇게 용감하고 눈치 없는 놈이?”“상처받은 자네에게 내가 다가감으로써 더 큰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씨발. 진짜, 좆같게.”

그는 붉게 부어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작게 흔들리는 어깨와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가 울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어깨를, 무너져 내린 그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며 다독여주었다. 그래, 다시는 그를 울리지 않겠다고 맞닿은 체온에 맹세하였다.


 그 날 이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실의 분위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잔소리하는 조노비치양과 그걸 장난스럽게 넘어가는 렉스,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전보다 더 활기차진 것 같았다. 회사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렉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 같았으면 서로 피하고 모르는 척 넘어갔을 것들을 서로 감싸주게 되었다. 지난 일로 서로 오해를 하고 상처받고 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크루그먼의 배려로 일찍 퇴근하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고 쉬기 위해 소파 앉아있는데 렉스가 양주를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건넸다. 한 잔, 두 잔 말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라왔다. 눈앞이 흐릿해져 갈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도 취해있는 상태라 띄엄띄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상심에 빠져있던 그를 도와준 알비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생도 시절 휴일마다 빠져나가 만난 사람 또한 그 알비라는 남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병이 있었는데 그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숨기는 것이 없냐고 물어왔지만, 이미 그에게 다 말해주었기에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싱겁다는 듯 투정을 부리다 이내 제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저 피아노가 알비라는 사람의 것이었다는 것과 생도 시절 렉스가 급하게 외출했던 것이 그와 연결되어있다는 것 등 알비라는 사람이 드렉슬러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었다. 분하지만, 이미 멀리 떠난 이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신이 렉스 안에서 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지 말이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 피아노는 저렇게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았기에 새하얀 피아노는 장식용으로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선을 그어놓은 듯 그 선을 넘어가려고 하면 그는 자신을 거부하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완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계절은 흘러 푸르던 나뭇잎들이 화려한 치장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회사에서 긴 야근 주간이 끝난 기념으로 오랜만에 그와 같이 요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집에 있는 식재료로 미리 준비하기로 하고 자신은 필요한 물품을 장보기로 하였다. 자주 가는 가게에 들려 종이에 적혀있는 식재료들을 사고 나서는데 점원이 서비스라며 사탕이 들어있는 작은 병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안 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단골손님 서비스라는 그녀의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렉스가 기다리고 있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맛있는 냄새가 제 코를 자극하였다. 재료만 손질한다더니 결국 요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품에 안은 식재료들을 안고 부엌으로 향하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고 있던 식재료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육수를 내는 그의 뒤로 가 꼭 끌어안았다.

“왔냐?”

“아아, 무슨 요리를 하려고 육수를 내고 있는 건가?”

“네가 파에야 먹고 싶다며, 싫으면 하지 말까?”

“싫을 리가 있나.”

“그럼 육수 좀 보고 있어. 나는 네가 사온 재료 좀 다듬으련다.”

제 품에서 벗어나 식재료가 담긴 봉투 쪽으로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육수가 잘 우러났는지 확인을 하고 야채를 볶기 위해 팬에 기름을 두르는데 렉스가 무언가를 들고 제 쪽으로 다가왔다.

“야, 이건 뭐냐?”“아아, 그거. 가게 점원이 단골 선물이라며 주더군. 사탕 같던데 자네 피곤할 때 먹으면 좋지 않을까?”

“흐음.. 한 번 먹어볼까?”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자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렉스는 사탕하나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입에 넣었다.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내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무진장 달다. 너 못 먹겠는데?”

“달지 않은 사탕이 어딨나?”

“이건 꼬맹이들이 즐겨 먹는 것보다 더 단데? 어, 이거 사탕 안에 시럽 같은 것도 들어있네?”

“그 정도인가? 그것보다 시럽이라니 신기하군.”

사탕 안에 시럽이 들어있다며 신기하다고 하나 더 꺼내먹는 렉스를 보다 하나 먹어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으나, 꼬마 아가씨들이 즐겨 먹던 사탕의 단맛을 떠올리니 맛보려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맛있게 먹는 렉스를 보니 굳이 먹을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육수도 다 우러났고 야채를 볶는 과정도 끝났기 때문에 가스 불을 끄고 빈 그릇에 옮기는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큰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놀라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니 렉스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머리가 굳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풀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잡아 전화기를 잡았다. 주치의의 번호를 떠올리며 번호를 입력하였다. 제발... 빨리 전화를 받길.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는 주치의에게 렉스의 상태를 설명하니 그는 최대한 빨리 갈 테니 도착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렉스를 똑바로 눕히고서 주치의가 말한 대로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괜찮을 거라고 주치의가 와서 그를 살려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치의는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놓아주라고, 그는 이미 떠났다고. 외면하고 싶었다. 감긴 두 눈이 장난이었다는 듯 자신이 좋아하던 푸른빛을 다시 한 번 빛내며 자신을 담길 바랐다. 차갑게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그를 나는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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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1. 03:32 | Posted by 아뮤엘

철이 들었을 무렵,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가문에 대해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다 부질없다고 느껴졌으니까. 부모님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자신을 한계까지 내몰았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고 나면 잘했다, 그래야 내 아들이지.라고 말하며 다음 목표를 내밀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따뜻했으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주었으니까. 주변에서는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다. 어린 나이에 창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난데, 지식을 습득하는 것 또한 뛰어나다며 자신을 칭찬하기 바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동경, 두려움, 악의, 견제 등이 섞인 시선은 자신을 지치게 하였지만, 부모님이 지어주는 그 미소에 목말라 있던 나는 더더욱 노력하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날 바라봐 주실 거야. 날 사랑해주실 거야. 그렇게 믿고 있었다.

세 살이 되던 해였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들로부터 더는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더 좋은 선생님들을 데리고 올 테니,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끔 주어지는 휴식시간이 좋았다. 아버지가 정한 일정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나는 재빨리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책꽂이에서 별에 대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찾아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지고 왔다. 별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며 배우는 걸 금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방에 있는 책이라곤 별에 관련된 동화 한 권뿐이었다. 아버지의 눈에 닿지 않게 책 사이에 잘 숨겨놓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들키지 않았다. 만약 들켰다면 바로 압수당하였을 것이다. 가져온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니 어떻게 숨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분명 책장에 꽂으면 들킬 것이 분명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였다. 침대 밑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길게 늘어진 이불을 살짝 걷어내고 침대 밑에 가져온 책들을 넣었다. 걷어내었던 이불을 내려 잘 가려졌는지 확인하고 책장에서 창에 대한 책을 꺼내 들어 소파에 앉았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가져온 책들을 읽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황이라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기로 하였다. 창에 관련된 책도 좋았으니까. 한 장, 두 장 넘기기 시작한 책은 벌써 끝을 달리고 있었다. 창의 쓰임새와 사용방법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어 좋았지만,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창을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면...”
펜을
쥐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새로운 선생님을 구해왔다며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되니 일찍 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잠을 자는 시늉을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침대에서 나왔다. 밑에 숨겨 놓았던 책 한 권을 꺼내 흐릿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 별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위대하고 흥미로운 세계였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혼자 공부하기 시작한 별의 세계는 자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가 새로 데려온 선생님이 앞에서 뭐라고 하던 자신의 머릿속에는 별로 가득 차 있었다. 별들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저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은 더해갔다. 별에 빠지면 빠질수록 다른 일들에 소홀히 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보고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꾸짖었다. 생각이 있냐며,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말이 주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홀린 듯 나는 아버지께 처음으로 내 의견을 말하였다. 천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별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말한 내 의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아버지는 그런 쓰레기 같은 학문으로 무얼 하려고 하냐고,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 따위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기사학교에 들어가 기사가 될 준비나 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듣고 방으로 돌아왔다. 뭔가 부자연 스러운 방...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 밑으로 들어가니 숨겨 놓았던 책들이 다 사라졌다. 책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하기 위해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집무실의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숨을 죽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대화의 내용은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가문의 흠이 되기 전에 빨리 학교에 보내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학교에 보내느니 자신들이 직접 감시를 하며 가르치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대답하고 있었다. 아아.. 내 편은.. 없었던 거구나. 그저 가문의 명예를 중시해 자신도 가문의 명예를 위한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더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짐을 쌌다. 자신은 그 찰나의 미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자신은 그저 그들의 장식품이었다는 사실이,그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면하기에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 그저 이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집사를 통해 기사학교에 들어가겠다고 아버지께 말을 전하였다. 아버지는 가서 정신 차리고, 가문에 흠이 가지 않도록 타인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래, 저택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어린 자식이 저택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나는데도 자식에 대한 걱정보다는 가문을 더 신경 쓰는 부모님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그 작은 미련마저 사라졌다.

기사학교에 들어가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가문을 보고 달라붙는 이들을 보니 짜증이나 작게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라 수업시간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학교의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직 가르치지 않은 내용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 했지만 역으로 자신이 틀린 부분을 지적했더니 그 뒤로 자신을 건드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학교 내에서 자신의 악명은 쌓여만 갔고, 가문에서도 편지가 날라왔지만, 편지는 좋은 땔감이 되었다. 거기다 2인 1실이 기본인 기숙사에서도 다들 자신과 같이 방을 쓰는 것을 꺼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혼자서 쓰게 된 것도 좋았다. 시간은 흘러 15살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죽이 맞는 선생을 만나 자신이 몰랐던 영역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수확이었다. 직접 창을 만들어보기도 하였으며 밤하늘이 맑은 날이면 망원경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별들을 관측하기도 하였다. 저택에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즐기며 나만의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주변에서는 자신을 괴짜,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춰 사는 것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렸으며, 타인의 시선 따위는 이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 내가 원했던 것들이었을 텐데 창밖을 보면 삼삼오오 모여 노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한구석을 타고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에 창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눈을 감고 그 감정을 잊고자 잠을 청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최소로 하며,자신이 가진 상처를 숨기고자 가슴 깊숙이 숨기고 숨겨 수많은 자물쇠로 꼭꼭 잠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하였다. 숨기는 것이 익숙해져 이제는 덤덤해졌을 무렵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2살 어린 올곧은 눈을 가진 알베르토 로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너. 소설 속에 나오는 기사처럼 정의를 실천하는 기사가 되고 싶다던 너는, 나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다들 기피하던 나와 같이 방을 쓰겠다고 나서는 너의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쳤었다.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보다 배는 심하게 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트집을 잡거나, 너의 물건을 어질러 놓는 등의 행위들. 너는 그때마다 나를 찾아와 또박또박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로 해달라며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로운 창을 연구하고 있자면 어느 순간 옆에 앉아 의견을 덧붙이기는 너의 모습에 놀라 저리 꺼지라며 연구노트를 숨겼지만, 너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순간부터 연구할 때 네가 옆에서 조언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가와 나의 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꺼지라고,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외면하여도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는 너의 모습에 나는 조금씩 너에게 물들어갔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간단하게 풀고 옆에서 잠든 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려 보인다고 놀렸더니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는지 조금씩 기르기 시작한 수염. 살짝 흐트러진 고동색 머리카락과 감긴 두 눈. 매일 자신에게 마법이라도 걸듯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입. 조금씩 나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던 너는 결국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자물쇠로 꽁꽁 잠가 숨겨두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풀어나갔다. 소중하다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깨달았을 때는 하나의 자물쇠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곧 너의 손에 열렸지만.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

굳게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 눈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사랑하네, 렉스”
“..아아
, 나도 사랑한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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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contrattacco

2015. 10. 4. 00:17 | Posted by 아뮤엘

보기 좋게 잘 정돈된 결 좋은 고동색 머리카락. 푸른 하늘을 닮은 듯 맑고 깨끗한 푸른 눈. 굳게 닫힌 붉은 입술. 지나치게 절제된 삶을 살아가는 너.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른 채, 모범적인 기사의 모습을 삶을 살아가는 너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따금 장난을 치게 된다. 성인 잡지를 실수인 척 너의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거나, 오늘처럼 맛없는 기숙사 내 식당의 밥 대신 숙소에서 밥을 만들어 먹을 때, 마주 앉은 너의 중심을 발로 슬쩍 누른다던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는 너의 모습에 다리가 저려서 그랬는데, 혹시 내가 실수했냐고 물어보면 너는 입술을 꾸욱 다문 채 괜찮다며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식사를 마저 하였다. 귀까지 붉게 물든 걸 보아 하니, 식사 후 먼저 샤워를 하겠다며 넌 욕실로 들어가겠지. 천천히 토스트를 입에 넣었다. 바삭거리는 식감이 좋았지만, 딱딱한 식감에 목이 아팠. 어쩔 수 없나? 커피를 그리 즐기지 않았지만, 따로 차를 타오려니 막 일어난 탓에 나른해 움직이기가 싫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 마시진 않았을 것이 뻔했다. 팔을 뻗어 로라스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로라스는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뻗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 제 몫의 토스트를 마저 먹더니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렇지. 제 예상대로 행동 하 그를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왔다. 그와 함께 지낸 지도 벌써 5년. 고된 임무로 인해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이들을 보면 그와 알고 지낸 지도 오래 되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자신의 성격을 알고도 같이 지내는 걸 보면 그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하는 소리. 남은 토스트를 입에 털어 넣고 식기를 싱크대에 놓은 뒤 욕실 쪽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문에 귀를 대고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였다. 밖을 의식하듯 작게 억눌린 신음이 끊겨 들리다 이내 작게 숨을 내쉬는 소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럼 그렇지. 문에서 귀를 떼고 조심스레 문에 기대었다. 이 짓도 벌써 몇 번짼지. 다른 사람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금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너의 모습을 보자면 속이 뒤틀렸다. 그 가면을 벗기고 싶었다. 네놈도 사람인데, 자신은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욕망을 꾹꾹 누르는 네 모습이 싫었으니까. 내 입맛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과 비교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너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알. 기약 없는 시험을 작한 지도 벌써 3년. 솔직히 2년째 되던 날, 이제 그만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만두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오기로 하는 것인데....

“.....그만둘까
반응이야 재밌긴 하지만, 슬슬 질리기도 하고.
시험을 잘 치른 학생에게 주는 상은 없는 건가?”
멍하니 고민을 하고 있는데 더운 열기가 제 몸을 감싸왔다. 이크 늦었다라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 봤지만, 뒤에서 끌어안아 도망도 치지 못한 채 그대로 잡혀버렸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흠칫 놀랐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ㅇ..알고..있었냐?”
으음.. 그렇게 대놓고 하는데 못 알아차리면 그게 바보가 아닐까 싶네만?”
ㅇ...언제부ㅌ...”
“뒷이야기는
나중에. 나는 상이 받고 싶거든.
생긋 웃는 얼굴로 자신을 안아 들어 침대로 향하는 로라스의 행동에 저항을 해봤지만, 귀를 깨물며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압도당해 버렸다.
야..잠시만 알..야???”
“쉿.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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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너와 이어지다.

2015. 9. 3. 23:27 | Posted by 아뮤엘

지쳐있던 나에게 너라는 존재는 구원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알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나를 판단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내 배경을 보고 접근하였다.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던 부모님마저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나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다가와 준 네가 얼마나 고맙던지. 너는 모르겠지. 내 잘못에 대해 꾸짖으면서도 잘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주는 너의 모습에 내가 바라던 사람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너에게 집착을 하게 되었다. 네가 내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피했다. 보기 싫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널 가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 15살의 나는 20살의 성인이 되었다. 가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제명하였다. 머물 곳이 없어져 안 되었다며 비웃음에 가득 찬 위로를 날리는 이들을 무시하고 제 방으로 들어왔다. 가문? 가문은 자신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기사단에서 생활했고 그가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으니까. 그저 그만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좋았으니까. 자신이 가문에서 제명되었다는 소문에 여기저기서 자신을 괴롭혔다. 밖으로 나가면 자신에게 몰려드는 인파에 지쳐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아, 연구 노트를 꺼내 아이디어를 정리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였다. 소문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밖으로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밥이야 연구를 할 때는 간단하게 먹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차와 빵, 과자 따위로 배를 채웠으니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밤하늘의 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새로 만든 발명품의 완성이 막바지에 이르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어느 미친놈이 방까지 찾아왔나 싶어 무시하려 했지만, 뒤이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렉스, 안에 있는가?"

"....알?"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여니 자신을 껴안는 알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자신을 꽉 껴안은 채 놓지 않는 녀석의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내가 임무를 수행하러 다녀온 사이 가문에서 제명되었다고 들었네. 괜찮나?"

"아? 뭐.. 딱히 가문에 대해 그리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건 그렇고 너야말로 임무는 잘 다녀왔냐?"

"아아.그리 위험한 임무는 아니었으니까"

소파에 앉는 녀석에게 차를 내어주고 맞은편에 앉는 데 불편한 듯, 한쪽 다리를 뻗는 알의 모습이 수상하여 실수인 척 발로 지그시 눌렀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알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새꺄 다쳤냐?"

"크음.. ㅋ..큰 부상은 아니니 걱정 말게"

"이번 임무는 안 위험하다며, 상처까지 입고. 거짓말 한 거냐?"

감추듯 다리를 살짝 빼는 녀석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몸을 일으켜 녀석의 다친 쪽의 다리를 잡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걷어 올린 바지 안에는 피가 배어 나왔는지 군데군데 붉게 물든 붕대가 보였다.

"야... 이거 뭔데?"

"...임무와는 관계없는 상처이니 걱정 말게"

"하아... 기다려봐. 보아하니 붕대만 감고 온 거 같은데 치료는 해야 할 거 아냐"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낸 뒤, 욕실에 들려 젖은 수건을 들고 앉았다. 조심스레 붕대를 풀자 어디에 쓸린 듯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바닥에 넘어져 쓸린 듯한.....

"...야.. 알"

"........"

"너 넘어졌냐?"

"......."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는 알의 모습에 제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하의 알베르토가 바닥에 자빠져 상처를 입다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상처를 치료하자 알은 부끄러운지 크음하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회피하였다. 상처를 치료하고 붉게 물든 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

"......."

"누가 발 걸었냐?"

"그럴 리가! 오는 길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그랬던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신에게 숨기는 거지? 혹시 마음에 든 여인을 구하다 넘어진 건가? 최근 선물에 대해서 묻더니... 정말 마음에 든 여인이라도 생긴 건가?

"야.. 치료 다 끝났으니까 슬슬 나가봐라"

"...렉스, 화났나?"

"내가 왜?"

자신이 생각해도 싸늘한 말투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인이 생긴 알은 언젠간 자신을 떠날 게 분명했으니까. 자신은 그 모습을 지켜볼 만큼 착한 성격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참고 책상에 앉았다. 들어오지 않는 내용의 연구 자료를 끄적이고 있자니, 뒤에서 누군가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렉스"

"..왜..."

"렉스, 왜 화가 났는지 말해주지 않겠나?"

"화 안 났으니까, 빨리 가라"

"거짓말은 좋지 않네. 응?"

".........."

"하아... 좀 더 분위기를 잡고 주려고 했건만"

"....엉?"

제 등 뒤로 느껴지던 따뜻한 감촉이 사라지고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로라스는 작은 상자를 들고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내 상자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더니 제 왼손 약지에 끼웠다. 설마 하는 마음에 손을 들어 확인하니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가 제 존재를 뽐내듯 빛나고 있었다.

"..야...알 이거..."

"자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나?"

"엉? 오늘이..."

책상 위 달력을 들어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였다. 분명...

"9월...3일이라.. 아.. 내 생일?"

"...역시 몰랐던 건가"

"새꺄.. 생일 선물이라도 그렇지 이게 뭐냐?"

작게 한숨을 쉬는 알의 모습에 괜스레 부끄러워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생일에 반지라니. 단순하다고 해도 끼고 다니기에는 좀.. 그래도 준 녀석의 성의가 있으니 고맙다고 말하고 서랍에 넣기 위해 반지를 빼내려는데 따뜻한 손이 그것을 저지하였다.

"주자마자 빼는 게 어딨나. 그리고 내 말 아직 안 끝났네"

"아니 끼고 다니기에는 좀..."

"사랑하네, 드렉슬러. 내 감정을 허락해 주겠나?"

조심스럽게 제 손에 입을 맞추며 자신에게 제 사랑의 허락을 구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뭐..? 알베르토가 누굴 사랑해? 날?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정말, 그가 날 사랑한다고?

"야... 장난 아니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진심이네"

"...새꺄... 그런 건 눈치를 주고 말해야지.. 시발. 새꺄 너 비겁해"

붉게 물든 얼굴이 그에게 들킬까 봐 겁이나 책상 위에 있던 공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우스운 듯 작게 킥킥거리며 자신을 껴안았다.

"그럼 대답은 긍정으로 알아듣겠네. Mi 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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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pentimento

2015. 8. 30. 00:44 | Posted by 아뮤엘

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정장을 입고 코 위를 가리는 검은색 반가면을 쓰고 집을 나섰다. 싸울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고, 무거운 갑옷 대신에 정장을 입는 일이 많아졌다. 제 얼굴을 가려주던 투구를 정장 위에 쓰기에는 너무 언밸런스하다며, 드렉슬러가 늦었지만, 생일 선물 겸 주는 거라며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처음에는 투구와 달리 가벼운 감촉에 혹시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직접 벗지 않는 이상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처음 투구가 아닌 가면을 쓰고 회사에 나간 날, 모두가 자신의 가면을 극찬하였다.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움에 어디서 샀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어찌 답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살짝 그가 있는 장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가렸다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지인에게 선물을 받았기에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하며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양심에 찔리진 않았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그와 연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이었던 것 같다. 서로 바쁜 것도 있고, 기념일을 챙기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먹는 정도로 끝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답례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바쁜 업무에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최근 자신과의 만남을 꺼리듯 자신을 피해 다니는 드렉슬러의 행동도 한몫을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당장 오늘이라도 회사에 양해를 구해 일찍 업무를 끝내고, 그에게 줄 선물을 찾으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사로 가는 길,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굵어졌다. 거세게 내리는 비에 잠시 근처 상점에 들렸다. 금방 그칠 거라 생각한 비는 제 예상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그치지 않고 내렸다. 검은색 우산을 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내리는 빗소리가 구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일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겨우 도착한 회사는 입구에서부터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속 울음이 섞인 목소리도 드문드문 들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니 울고 있는 아이들과 조노비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홀든이 제 손을 잡고 따라와 달라며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끌려 자신이 향한 곳은 이사실이었다.여기는 왜? 그에게 의아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문을 열어주며 눈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그가 자신을 속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작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실로 들어가니 수척해 보이는 크루그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자 그제서야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회사 분위기가 이러냐고 묻자 그는 말없이 작은 상자를 자신에게 건네주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여니 상자 안에는 팔이 들어있었다. 그래 자신이 잘 아는 팔이 상자 안에 붉게 물든 채 들어있었다. 새파랗던 제복은 피에 젖어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있었고, 그가 자랑하던 창은 무엇인가에 절단된 듯 일부만이 남겨져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만을 빌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크루그먼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금고로 다가가 열더니 쪽지와 작은 열쇠를 꺼내 자신에게 전해주었다. 멍하니 제 손에 놓인 것들을 보고 있자니, 다리오가 죽었을 때 자신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한 것이라며 자신은 분명 전해줬다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유품...인가? 그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잘게 떨리는 그의 뒷모습에 조용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쪽지에 적힌 곳을 향해 달렸다.


쪽지에 적힌 곳은 자신도 잘 아는 곳이었다. 자신도 자주 가는 곳이었으니까. 세찬 비를 뚫고 도착한 곳은 제가 사랑하는 이의 보금자리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피 냄새가 제 후각을 자극하였다. 피비린내를 따라 자신이 도착한 곳은 안방이었다. 새하얗던 시트는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곳곳에 튀긴 피와 부서진 물건들만으로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갔다. 쪽지에 적힌 곳은 이 안방 침대 바닥이었다. 침대를 옆으로 미니 작은 문이 보였다. 핏자국으로 범벅된 문고리를 보아하니 그가 이곳으로 도망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급한 마음 때문일까 자꾸 엇나가는 열쇠에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사다리에 다리를 걸치고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다 내려가니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어두웠던 시야가 갑작스레 밝아졌다. 급격한 변화에 눈을 감고 적응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조심스레 눈을 뜨니 제 눈에 들어온 것은 평온한 듯 눈을 감고 잠이 든 제 연인의 모습과 각종 가면과 창이 나열되어있는 방이었다. 정갈하게 입고 다니던 제복은 칼에 베인 듯 다 헤져 있었다.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생채기가 생긴 얼굴을 만졌다.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은 그가 더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입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덮어주었다. 그를 따뜻한 곳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안아 드는데 무엇인가가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몸을 낮춰 떨어진 것을 주웠다. 유일하게 붉게 물들지 않은 종이를 펼치니 종이에는 참으로 그다운 글이 적혀있었다.


[되도록 직접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잘 지내라.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이 더 큰 선물이었을 텐데 그에게 받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이렇게 떠나 보내야 하는 현실에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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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bifurcación

2015. 8. 23. 01:24 | Posted by 아뮤엘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나는 항상 선택의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오늘은 무엇을 할지. 평소라면 생각하지 않았을 것들에 대해 고민을 하고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 선택한다. 무엇이 나를 이리 만들었나 생각해보니 모든 선택의 중심에는 네가 있었다. 그래 너와 만나고 나서부터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드렉슬러 아저씨!” 
아앙? 무슨 일이냐” 
고된 서류 업무로 혹사당한 허리를 스트레칭으로 풀며 저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노란 우비를 입은 작은 소녀가 제 앞에 서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요즘 피곤하신 것 같아서 마를렌 언니와 함께 만들어봤어요” 
“엥? 뭔지 모르겠지만 고맙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선물은 마음이 중요한 거다. 고로 내 마음에 쏙 드니 걱정 마라, 샬럿” 
기특한 마음이 들어 제 앞에 서 있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언제 왔는지 샬럿은 이제 저랑 놀러 갈 거라고요! 라고 외치며 샬럿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나서는 흑발의 양 갈래 소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제 모습이 신기했는지 어느새 다가온 알베르토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뭐라 답하면 좋을까 순간 고민하다 이내 떠올린 답을 말하였다. 
“아아, 우리 작은 아가씨에게 선물을 받았거든” 
“....아가씨라... 아아
, 샬럿 양인가?” 
별일 아니니 네 자리로 가서 일이나 해라. 저어기 어떤 분께서 노려보고 계신다” 
“...그게
 좋겠군.” 
저 멀리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타라의 모습에 알베르토를 돌려보내고 놓았던 서류를 다시 들었다. 최근 밀려오는 업무에 연이어 야근한 상태였기에, 오늘만은 야근을 피하고 싶었다. 마지막 남은서류를 처리하고 시계를 보니 퇴근까지 십여 분이 남아있었다. 다행히 야근은 피한 건가? 샬럿에게 받은 선물을 조심스레 가방에 챙기고 정리된 서류들을 들고 보고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다며 가서 쉬라는 윌라드의 말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서 그런지, 회사 밖의 풍경이 어색했다. 일찍 끝난 김에 장이라도 볼까 하는 마음에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이은 야근에 장을 볼 시간이 없어, 냉장고가 텅 비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채소와 과일, 육류 등식재료를 사고 나니 양손 가득 짐이 들려 있었다.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짐을 내리고 잠긴 문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 
“아아
, 왔나?” 
“네가 왜 여깄냐?” 
“일이 끝났으니까. 당연한 게 아니겠나? 
“아니. 그러니까 왜 네 집에 안 가고 내 집에 있냐고 묻고 있잖냐. 짜샤 
양손에 들린 제 짐의 존재를 알았는지 자연스레 받아들고 부엌으로 향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에 멍하니 서 있다 따라가며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오는 알베르토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뭐.. 한 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이제 익숙해지자 다리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와 간단히 채소를 곁들여 먹으려고 했지만, 그 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았다. 고기를즐겨 먹는 자신과 달리 알베르토 녀석은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오늘 사온 재료들을 천천히 떠올리며 알베르토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생각하고 있자니 뒤에서 알베르토가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뭐냐
?” 
“뭘 그리 생각하고 있나, 렉스” 
“네 녀석을 내쫓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왜” 
으음.. 오늘은 가스파초와 빠에야가 좋겠어.” 
“시발, 진짜 귀찮은 것만 시키지?” 
“날 내쫓을 생각을 한다며, 거짓말이었군?” 
아......”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제 볼에 입을 맞추고 거실로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는 알베르토의 모습에 괜스레 짜증이 났다. 토마토 하나를 꺼내 던지니 알베르토 녀석은 에피타이전가? 맛있게 먹겠네라며 던진 토마토를 한입 베어 물며 제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오!! 진짜!“ 
“맛있는 저녁 기대하고 있겠네, 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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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canción de cuna

2015. 8. 16. 00:24 | Posted by 아뮤엘

알고 있었다. 네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 나를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만난 것이었는데. 금방 떠날 거라던 너는 하루, 이틀 조금씩 돌아가는 날짜를 미루었다. 처음에는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지상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서 그렇구나.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너와 만난 지도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래서일까? 잊고 말았다. 네가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오랜만에 같이 산책을 제 손을 이끄는 너의 손을 귀찮다며 쳐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녀올게. 라고 약간은 씁쓸한 말투를 하며 집을 나서는 너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평소에도 같은 일이 몇 번 있었기에 별일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들고 있던 설계도를 마저 작성하였다. 열매가 달게 잘 익었다며 바구니 한가득 열매를 따온 녀석에게 잘했다고 칭찬하고 거의 마무리된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미 완벽한 설계도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더 확인해보고 나서야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몇 시간이나 앉아서 작업했기 때문일까? 굳은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부엌으로 가니, 요리를 하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였다. 짙은 고동색의 머리와 남자인 자신이 봐도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에서 꼭 껴안았다. 놀랐는지 흠칫 떨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녀석의 말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하던 일 하라고 하자 긴장으로 경직된 손놀림으로 야채를 씻었다. 녀석의 반응이 우스워 그대로 안겨있는데 이내 익숙해졌는지 노련한 손놀림으로 야채를 다듬기 시작하였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날따라 그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알은 육류를 먹지 않았다. 야채와 과일도 적은 양만 먹었다. 저도 고기는 그리 즐겨 먹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해주는 채식요리가 좋았다. 그가 요리한 음식들을 식탁 위에 옮기고 자리에 앉자 맞은 편에 그가 앉았다. 평소보다 화려한 식탁. 특별한 날에나 할 법한 요리들이 식탁 가득 올라와 있었다.

“야 오늘 무슨 일 있냐?”

“......아... 그냥 오늘은 이렇게 차려 먹고 싶어서 그랬다네”

뜸 들이다 말하는 그의 태도가 신경 쓰였지만,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많은 놈이라 평소에도 이렇게 뜸 들이는 일이 잦았으니까.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그는 자신과 외출하기를 원했다. 이 녀석이 왜 이러지.. 거절할 때마다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서는 그의 모습을 그냥 넘기지 말걸. 계속 거절하기에 미안해 딱 한 번 그와 외출을 하게 되었다. 그와 자신이 처음 만난 호숫가로 도시락을 싸들고. 평소 외출을 한다고 하면 들떠야 정상 일 텐데, 오늘따라 어두운, 억지로 웃는 듯한 그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힘들면 그냥 집에 가서 쉴까? 라고 물으니 괜찮다고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숫가에 도착해 같이 과일도 따고 물놀이를 실컷 즐겼다. 그러다 지쳐 풀밭에 쓰러지듯 누웠다. 어느덧 해는 지기 시작했고 저 멀리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렉스.. 오늘 즐거웠나?”

“아? 넌 아닌 것처럼 말한다?”

“나도 즐거웠다네”

제 눈을 덮는 따뜻한 손길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즐겼다.

“렉스... 자네는 내가.. 없어도 괜찮겠나?”

“엉? 그게 무슨...”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가볍게 제압하였다. 그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제 눈을 덮은 손을 치우려고 했지만, 그는 그것조차 불가능하게 하였다.

“..무슨..일인데?”

말없이 저의 몸을 반쯤 일으켜 껴안는 그의 행동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감겨있던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날개였다. 주변에 새라도 있나 싶었지만, 이렇게 큰 날개를 가질만한 생명체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야.. 알.. 이상해. 너 날개가 달려 있어...”

“......”

“야.... 보라니까? 너 날개가...???”

새하얀 빛을 자랑하던 날개는 조금씩 검게 물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저를 안은 알베르토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그의 날개에 손을 뻗었다. 검게 물든 날개는 제 손에 닿자마자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그의 팔에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대답 없이 저의 품에 기대어있는 그를 살짝 밀어내 제 어깨에 기대어 있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창백해진 얼굴. 다문 입가 사이로 피를 흘리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야.. 알 왜 그래.. 장난이지?”

“ㅁ...안...하,네”

그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날개가 자신의 손길에 흩날려졌던 것처럼, 그의 몸도 조금씩... 지금 제 눈앞에 닥친 현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평소와 같이 그와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는데.

“야... 새꺄..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해!!!”

“....우..ㄹ...지....마,ㄹ..게”

“차라리..꿈이라고... 해달라고”

“사,ㄹ....ㅎ...네”

고통스러울 텐데, 웃음을 지으며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진 시야 때문에 자꾸 보이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이제는 상체만 남은 그의 얼굴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너의 제안을 거부하지 말걸. 너와의 추억을 더 많이 만들걸.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이렇게 말없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두고 떠나는 그도 미웠지만, 지난 날들이 떠오르며 제 행동들이 다 후회가 되었다. 푸르게 빛나던 눈은 감기고, 어깨에 닿던 고동색 머리도 조금씩 흩어져갔다. 그가 들을 수 있도록,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울음에 잠긴 목소리를 애써 다듬고 그가 자주 불러주던 자장가를 떠올리며 노래하였다. 제 노랫소리가 그에게 닿기만을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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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regàlo

2015. 8. 2. 00:07 | Posted by 아뮤엘

출장으로 인해 회사에서 벗어나 일본에 와있었다. 동양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해 이곳저곳 기웃거리게 되었다. 키가 작은 사람들, 길가에 보이는 사람들 밤하늘처럼 검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졌다. 자신을 안내하는 회사에서 붙여준 사람을 따라 자신이 묵을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숙소는 분홍빛 꽃잎을 흩날리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저렇게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니 놀라웠다. 
“저기 저 분홍색 꽃잎을 가진 나무는 뭐라 부르나?” 
“아아, 저건 이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라고 합니다” 
흐응..” 
멍하니
 서서 나무를 구경하는데 옆에 서 있던 가이드가 슬슬 가봐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숙소로 들어갔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고 갑갑한 정장을 벗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유카타..? 라고 하던가. 뭔가 헐렁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입고 있다 보니 편했다. 가져온 서류를 처리하다 보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니 가이드가 약속 시각이 되었다고 슬슬 준비해달라고 말했다. 알았다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가져온 정장으로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왔다. 남자가 안내하는 곳을 말없이 따라가니 어떤 방 앞에 멈추어 방문을 열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장본인이 앉아 있었다. 마주 앉아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일에 대한 말을 나누었다. 긴 식사 시간을 보냈다. 서로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챙기기 위해 식사 시간 내내 팽팽한 신경전을 펼쳐졌다. 자신도 회사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왔기 때문에 최대한 회사에 이득이 되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더더욱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누워 있는데 자신의 지친 모습을 본 가이드가 온천이라도 즐기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 왔다. 온천이라..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크으~ 시원하네” 
온천수에 몸이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고된 회사 업무로 쌓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충분히 온천을 즐기고 방으로 돌아왔다. 온천으로 피로가 풀려서인지 감겨오는 눈에 준비된 이불에 몸을 맡겼다. 

눈을 뜨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오랜만에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니 가이드가 룸서비스를 시킨 것인지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평소 자신이 사용하던 포크와 나이프가 아닌 기다란 막대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이걸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뒤늦게 포크를 건네주는 숙소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밥도 먹었겠다 떠나기 전 마을이나 둘러볼까 싶어 가이드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숙소를 나섰다. 활발한 시장과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가이드가 어딘가를 들려도 되냐고 물어봤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떤 가게였다. 향기로운 향이 가득 나는 가게에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차를 파는 가게라고 했다. 무슨 차가 있나 싶어 구경하는데 가이드가 자신에게 어떤 병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 벚꽃 차라고 말했다. 병 안을 보니 연 분홍색을 지닌 꽃들이 제 색을 잃지 않고 담겨있었다. 아름다웠다. 놀러 온 기념으로 사 갈까 싶어 계산하기 위해 한 병을 올려놓는데, 차를 파는 상인이 뭐라 말을 하였다. 무슨 뜻인지 몰라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 차가 기침이나 숙취, 식중독에 좋다고 말하고 있다고 통역해주었다. 숙취라... 매번 자신과 술을 마시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는 고동빛 머리칼을 가진 이가 떠올랐다. 녀석도 차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리 단 차도 아니라고 하니... 벚꽃 차를 하나 더 사 들고 숙소로 향하였다. 조금은 기뻐해 주려나 선물을 받고 좋아할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작은 선물이 그의 마음에 들기만을 바라며 작게 미소를 지으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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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la pioggia

2015. 7. 31. 22:04 | Posted by 아뮤엘

비가 내리는 날은 싫었다. 쓸모없는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니까. 창밖으로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이내 커튼을 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연구에 대한 것들을 적어 내리던 노트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계속 앉아있던 탓인지 우드득 소리를 내는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었다. 연구실의 불을 끄고 부엌으로 가 찻물을 끓였다. 평소 즐겨 마시진 않지만, 우유와 꿀을 꺼내 밀크티를 탈 준비를 하였다. 완성된 밀크티를 테이블에 놓고, 같이 곁들일 티푸드를 찾아 찬장을 뒤적거렸다. 뭐 괜찮은 것이 없나 찾는데, 얼마 전 회사 여직원이 선물이라며 준 쿠키가 눈에 들어와 꺼내 들고 소파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포장지를 뜯으니 아기자기하게 들어있는 쿠키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수제 쿠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수제 쿠키를 선물한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뭐 맛만 좋다면야 라는 생각으로 쿠키 하나를 집어 먹었다. 제가 단것을 싫어하는 걸 아는지 몰라도 그리 달지 않아 달게 탄 밀크티와 어울렸다. 쿠키 자체도 맛있었기에 평소 쿠키를 즐기지 않던 자신도 계속 집어 먹게 되었다. 밥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꽤 많은 양의 쿠키를 먹었다. 더 이상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상자를 덮고 끈적한 손을 닦기 위해 싱크대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밖에서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라는 생각에 손을 씻고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십니까?"

"날세, 렉스"
"무슨 일이라도 있냐?"
비 오는 날, 사람을 밖에 세워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문을 열어 그가 들어오게 하였다. 비에 젖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뽀송뽀송한 녀석을 보니 왠지 문밖으로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꾹 누르고 그가 들어올 수 있게 비켜섰다.
"무슨 일이냐"
"자네가 오늘 찾아와 달라고 하지 않았나?"
"아...그랬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얼마 전, 이번 연구에 대한 의견을 묻고자 그에게 오라고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니 그는 괜찮다며 소파에 앉았다.
"차라도 마실래?"
"아아, 그럼 고맙지. 그건 그렇고 이건 뭔가?"

"어, 그거? 저번에 회사 여직원이 선물이라고 준 건데 달지 않아서 꽤 괜찮더라"
"흐응.."
그가
좋아하는 차를 타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연구실로 가 그에게 의견을 묻고자 한 부분들을 적은 노트를 가져왔다.

실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자고 싶었지만, 저 빗속을 뚫고 왔을 그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그에게 물으려던 것을 빨리 묻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노트를 받아들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더니 그의 옆자리를 탁탁 쳤다.
"뭐냐."
"이리오게."
"....??"
그의
옆자리에 앉자 큰 손이 제 눈을 가리고 그대로 눕게 하였다.
"어...???"

"한숨 자고 있게. 어차피 묻고자 하는 내용은 이 노트에 있으니 여기에 답을 적도록 하지"
제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그가 얄미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수마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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