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쳐있던 나에게 너라는 존재는 구원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알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나를 판단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내 배경을 보고 접근하였다.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던 부모님마저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나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다가와 준 네가 얼마나 고맙던지. 너는 모르겠지. 내 잘못에 대해 꾸짖으면서도 잘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주는 너의 모습에 내가 바라던 사람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너에게 집착을 하게 되었다. 네가 내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피했다. 보기 싫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널 가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 15살의 나는 20살의 성인이 되었다. 가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제명하였다. 머물 곳이 없어져 안 되었다며 비웃음에 가득 찬 위로를 날리는 이들을 무시하고 제 방으로 들어왔다. 가문? 가문은 자신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기사단에서 생활했고 그가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으니까. 그저 그만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좋았으니까. 자신이 가문에서 제명되었다는 소문에 여기저기서 자신을 괴롭혔다. 밖으로 나가면 자신에게 몰려드는 인파에 지쳐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아, 연구 노트를 꺼내 아이디어를 정리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였다. 소문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밖으로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밥이야 연구를 할 때는 간단하게 먹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차와 빵, 과자 따위로 배를 채웠으니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밤하늘의 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새로 만든 발명품의 완성이 막바지에 이르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어느 미친놈이 방까지 찾아왔나 싶어 무시하려 했지만, 뒤이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렉스, 안에 있는가?"
"....알?"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여니 자신을 껴안는 알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자신을 꽉 껴안은 채 놓지 않는 녀석의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내가 임무를 수행하러 다녀온 사이 가문에서 제명되었다고 들었네. 괜찮나?"
"아? 뭐.. 딱히 가문에 대해 그리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건 그렇고 너야말로 임무는 잘 다녀왔냐?"
"아아.그리 위험한 임무는 아니었으니까"
소파에 앉는 녀석에게 차를 내어주고 맞은편에 앉는 데 불편한 듯, 한쪽 다리를 뻗는 알의 모습이 수상하여 실수인 척 발로 지그시 눌렀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알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새꺄 다쳤냐?"
"크음.. ㅋ..큰 부상은 아니니 걱정 말게"
"이번 임무는 안 위험하다며, 상처까지 입고. 거짓말 한 거냐?"
감추듯 다리를 살짝 빼는 녀석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몸을 일으켜 녀석의 다친 쪽의 다리를 잡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걷어 올린 바지 안에는 피가 배어 나왔는지 군데군데 붉게 물든 붕대가 보였다.
"야... 이거 뭔데?"
"...임무와는 관계없는 상처이니 걱정 말게"
"하아... 기다려봐. 보아하니 붕대만 감고 온 거 같은데 치료는 해야 할 거 아냐"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낸 뒤, 욕실에 들려 젖은 수건을 들고 앉았다. 조심스레 붕대를 풀자 어디에 쓸린 듯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바닥에 넘어져 쓸린 듯한.....
"...야.. 알"
"........"
"너 넘어졌냐?"
"......."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는 알의 모습에 제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하의 알베르토가 바닥에 자빠져 상처를 입다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상처를 치료하자 알은 부끄러운지 크음하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회피하였다. 상처를 치료하고 붉게 물든 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
"......."
"누가 발 걸었냐?"
"그럴 리가! 오는 길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그랬던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신에게 숨기는 거지? 혹시 마음에 든 여인을 구하다 넘어진 건가? 최근 선물에 대해서 묻더니... 정말 마음에 든 여인이라도 생긴 건가?
"야.. 치료 다 끝났으니까 슬슬 나가봐라"
"...렉스, 화났나?"
"내가 왜?"
자신이 생각해도 싸늘한 말투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인이 생긴 알은 언젠간 자신을 떠날 게 분명했으니까. 자신은 그 모습을 지켜볼 만큼 착한 성격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참고 책상에 앉았다. 들어오지 않는 내용의 연구 자료를 끄적이고 있자니, 뒤에서 누군가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렉스"
"..왜..."
"렉스, 왜 화가 났는지 말해주지 않겠나?"
"화 안 났으니까, 빨리 가라"
"거짓말은 좋지 않네. 응?"
".........."
"하아... 좀 더 분위기를 잡고 주려고 했건만"
"....엉?"
제 등 뒤로 느껴지던 따뜻한 감촉이 사라지고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로라스는 작은 상자를 들고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내 상자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더니 제 왼손 약지에 끼웠다. 설마 하는 마음에 손을 들어 확인하니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가 제 존재를 뽐내듯 빛나고 있었다.
"..야...알 이거..."
"자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나?"
"엉? 오늘이..."
책상 위 달력을 들어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였다. 분명...
"9월...3일이라.. 아.. 내 생일?"
"...역시 몰랐던 건가"
"새꺄.. 생일 선물이라도 그렇지 이게 뭐냐?"
작게 한숨을 쉬는 알의 모습에 괜스레 부끄러워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생일에 반지라니. 단순하다고 해도 끼고 다니기에는 좀.. 그래도 준 녀석의 성의가 있으니 고맙다고 말하고 서랍에 넣기 위해 반지를 빼내려는데 따뜻한 손이 그것을 저지하였다.
"주자마자 빼는 게 어딨나. 그리고 내 말 아직 안 끝났네"
"아니 끼고 다니기에는 좀..."
"사랑하네, 드렉슬러. 내 감정을 허락해 주겠나?"
조심스럽게 제 손에 입을 맞추며 자신에게 제 사랑의 허락을 구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뭐..? 알베르토가 누굴 사랑해? 날?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정말, 그가 날 사랑한다고?
"야... 장난 아니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진심이네"
"...새꺄... 그런 건 눈치를 주고 말해야지.. 시발. 새꺄 너 비겁해"
붉게 물든 얼굴이 그에게 들킬까 봐 겁이나 책상 위에 있던 공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우스운 듯 작게 킥킥거리며 자신을 껴안았다.
"그럼 대답은 긍정으로 알아듣겠네. Mi 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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