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었을 무렵,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가문에 대해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다 부질없다고 느껴졌으니까. 부모님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자신을 한계까지 내몰았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고 나면 잘했다, 그래야 내 아들이지.라고 말하며 다음 목표를 내밀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따뜻했으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주었으니까. 주변에서는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다. 어린 나이에 창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난데, 지식을 습득하는 것 또한 뛰어나다며 자신을 칭찬하기 바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동경, 두려움, 악의, 견제 등이 섞인 시선은 자신을 지치게 하였지만, 부모님이 지어주는 그 미소에 목말라 있던 나는 더더욱 노력하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날 바라봐 주실 거야. 날 사랑해주실 거야. 그렇게 믿고 있었다.
열세 살이 되던 해였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들로부터 더는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더 좋은 선생님들을 데리고 올 테니,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끔 주어지는 휴식시간이 좋았다. 아버지가 정한 일정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나는 재빨리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책꽂이에서 별에 대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찾아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지고 왔다. 별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며 배우는 걸 금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방에 있는 책이라곤 별에 관련된 동화 한 권뿐이었다. 아버지의 눈에 닿지 않게 책 사이에 잘 숨겨놓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들키지 않았다. 만약 들켰다면 바로 압수당하였을 것이다. 가져온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니 어떻게 숨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분명 책장에 꽂으면 들킬 것이 분명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였다. 침대 밑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길게 늘어진 이불을 살짝 걷어내고 침대 밑에 가져온 책들을 넣었다. 걷어내었던 이불을 내려 잘 가려졌는지 확인하고 책장에서 창에 대한 책을 꺼내 들어 소파에 앉았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가져온 책들을 읽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황이라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기로 하였다. 창에 관련된 책도 좋았으니까. 한 장, 두 장 넘기기 시작한 책은 벌써 끝을 달리고 있었다. 창의 쓰임새와 사용방법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어 좋았지만,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펜을 쥐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새로운 선생님을 구해왔다며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되니 일찍 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잠을 자는 시늉을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침대에서 나왔다. 밑에 숨겨 놓았던 책 한 권을 꺼내 흐릿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 별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위대하고 흥미로운 세계였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혼자 공부하기 시작한 별의 세계는 자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가 새로 데려온 선생님이 앞에서 뭐라고 하던 자신의 머릿속에는 별로 가득 차 있었다. 별들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저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은 더해갔다. 별에 빠지면 빠질수록 다른 일들에 소홀히 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보고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꾸짖었다. 생각이 있냐며,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말이 주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홀린 듯 나는 아버지께 처음으로 내 의견을 말하였다. 천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별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말한 내 의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아버지는 그런 쓰레기 같은 학문으로 무얼 하려고 하냐고,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 따위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기사학교에 들어가 기사가 될 준비나 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듣고 방으로 돌아왔다. 뭔가 부자연 스러운 방...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 밑으로 들어가니 숨겨 놓았던 책들이 다 사라졌다. 책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하기 위해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집무실의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숨을 죽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대화의 내용은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가문의 흠이 되기 전에 빨리 학교에 보내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학교에 보내느니 자신들이 직접 감시를 하며 가르치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대답하고 있었다. 아아.. 내 편은.. 없었던 거구나. 그저 가문의 명예를 중시해 자신도 가문의 명예를 위한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더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짐을 쌌다. 자신은 그 찰나의 미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자신은 그저 그들의 장식품이었다는 사실이,그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면하기에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 그저 이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집사를 통해 기사학교에 들어가겠다고 아버지께 말을 전하였다. 아버지는 가서 정신 차리고, 가문에 흠이 가지 않도록 타인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래, 저택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어린 자식이 저택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나는데도 자식에 대한 걱정보다는 가문을 더 신경 쓰는 부모님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그 작은 미련마저 사라졌다.
기사학교에 들어가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가문을 보고 달라붙는 이들을 보니 짜증이나 작게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라 수업시간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학교의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직 가르치지 않은 내용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 했지만 역으로 자신이 틀린 부분을 지적했더니 그 뒤로 자신을 건드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학교 내에서 자신의 악명은 쌓여만 갔고, 가문에서도 편지가 날라왔지만, 편지는 좋은 땔감이 되었다. 거기다 2인 1실이 기본인 기숙사에서도 다들 자신과 같이 방을 쓰는 것을 꺼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혼자서 쓰게 된 것도 좋았다. 시간은 흘러 15살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죽이 맞는 선생을 만나 자신이 몰랐던 영역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수확이었다. 직접 창을 만들어보기도 하였으며 밤하늘이 맑은 날이면 망원경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별들을 관측하기도 하였다. 저택에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즐기며 나만의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주변에서는 자신을 괴짜,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춰 사는 것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렸으며, 타인의 시선 따위는 이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 내가 원했던 것들이었을 텐데 창밖을 보면 삼삼오오 모여 노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한구석을 타고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에 창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눈을 감고 그 감정을 잊고자 잠을 청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최소로 하며,자신이 가진 상처를 숨기고자 가슴 깊숙이 숨기고 숨겨 수많은 자물쇠로 꼭꼭 잠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하였다. 숨기는 것이 익숙해져 이제는 덤덤해졌을 무렵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2살 어린 올곧은 눈을 가진 알베르토 로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너. 소설 속에 나오는 기사처럼 정의를 실천하는 기사가 되고 싶다던 너는, 나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다들 기피하던 나와 같이 방을 쓰겠다고 나서는 너의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쳤었다.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보다 배는 심하게 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트집을 잡거나, 너의 물건을 어질러 놓는 등의 행위들. 너는 그때마다 나를 찾아와 또박또박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로 해달라며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로운 창을 연구하고 있자면 어느 순간 옆에 앉아 의견을 덧붙이기는 너의 모습에 놀라 저리 꺼지라며 연구노트를 숨겼지만, 너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순간부터 연구할 때 네가 옆에서 조언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가와 나의 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꺼지라고,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외면하여도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는 너의 모습에 나는 조금씩 너에게 물들어갔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간단하게 풀고 옆에서 잠든 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려 보인다고 놀렸더니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는지 조금씩 기르기 시작한 수염. 살짝 흐트러진 고동색 머리카락과 감긴 두 눈. 매일 자신에게 마법이라도 걸듯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입. 조금씩 나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던 너는 결국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자물쇠로 꽁꽁 잠가 숨겨두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풀어나갔다. 소중하다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깨달았을 때는 하나의 자물쇠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곧 너의 손에 열렸지만.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
굳게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 눈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사랑하네, 렉스”
“..아아, 나도 사랑한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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