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번째 생일을 축하해, 우리 아들"이젠 기억조차 흐릿한 어린 날의 기억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상에 가득 차려져 있고, 따뜻한 온기가 집안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전환되어 자신의 어머니라는 존재가 자신을 끌어안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ㅋ....ㅡ..읍...엄마는,..ㅌ..엔을 많이 사랑,한..ㄷ..다"
"......하...,아..."
매년, 이맘쯤이면 항상꾸는 악몽임에도 매번 적응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죄를 일깨우는 것인지, 아니면....
"....부질없는.."
침대 옆 탁자에 올려진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빠른 시간이었다.
악몽의 여파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켜 기대듯 앉았다.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보이는 물안개가 낀 새벽 거리의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왔다.
잠이 더 올 거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이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또 싫기에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였다.
평소보다 긴 샤워를 마치고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였다.
샐러드와 토스트, 커피를 식탁에 차려놓고 보니 오늘따라 식탁이 허전해 보였다.
"...빌어먹을"
갑작스레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신물에 욕이 나왔다.
다 악몽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겪어왔지만, 오늘따라 심한 증세에 기껏 준비한 음식들을 정리하였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꾸역꾸역 올라오는 신물
그리고.. 잊지 말라는 듯 머릿속에 맴도는 악몽
"...가봐야 되나..."
피하는 것도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필요한 옷가지와 물건들만 간단히 챙겨 예전 자신이 살던 마을에 도착하였다.
재단이 한가한 시기라 그런지 급작스러운 휴가 요청에도 바로 승낙을 해주어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고향의 풍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폐허가 된 거리
반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백골들
그을린 흔적과 이제는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들
우거진 숲과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운 마을이었는데...
자신이 마을을 떠나고 얼마 뒤, 정체 모를 무리의 습격을 받아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범인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직접 보니 참혹하긴 하지만, 그렇게 화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을 광장에 있는 분수를 지나 작게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빛바랜 푸른 지붕을 가진 작은 집이 어린 시절 자신의 보금자리가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집에 다가갈수록 지끈거리던 머리가, 꾸역꾸역 올라오던 신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역시나..."
죄책감..이라도 느꼈던 것일까?
사람의 심리는 복잡하다고, 없는 병까지 만든다더니...
"웃기는군"
망가진 채로 방치되어서인지, 경첩이 녹슨 것인지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쌓여 있던 먼지가 시야를 잠시 가로막았지만, 곧 가라앉았다.
자신이 떠난 후, 방문한 이가 없는지 먼지가 쌓이고 낡았다는 것 외에는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추억에 잠겨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평소 깔끔하던 어머니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방의 모습에 작게 미소가 그려졌다.
책상 위에 놓인 자신과 어머니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네 화가가 그려준 그림이었는데...
"....어머니..."
따스한 햇살처럼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밤하늘을 담은듯한 검은 눈동자
항상 웃으며, 밝은 모습으로 자신을 대해주시던...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의 얼굴을 잊고 있었다는 게 이해가 가 지않을 정도로
"...으,윽......"
갑작스러운 두통에 머리를 붙잡고 벽에 기대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와 처음으로 요리를 한 날
같이 책을 사러 간 날
사부님에게 칭찬을 받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모습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재생되어 갔다
왜 잊고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더 기억을 못 할지언정..
그리고 기억의 흐름은 마지막을 향하였다
몇 번째인지는 기억이 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일이라고 한껏 힘을 내어 요리하셨고 둘만의 작은 파티를 즐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한 남자에 의해 분위기는 전환되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어머니는 재빨리 자신을 옷장 안으로 숨긴 뒤 나오지 말라고 하셨고 그런 어머니의 단호한 표정과 말씀에 조용히 옷장에서 기다렸다.
거실에서 남자의 고함이 들리고 어머니는 모른다고 계속해서 외면하셨고,
그리고...
곧이어 어머니의 비명이 들리고 남자가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비명이 신경 쓰여 옷장에서 나와 어머니가 계실 거실로 나가는 나의 모습이 보이고 동시에 그때의 혈향이 자신에게도 전해져왔다.
거실로 다가갈수록, 혈향은 짙어지고 어머니는 소파에 기대어 다가오는 자신을 힘없이 쳐다보셨다.
복부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무서워서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을..
그런 자신을 이해한다는 듯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자신을 껴안고 달래주셨다
자신은 괜찮다고.. 다만, 혼자 남을 내가 걱정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작게, 속삭이듯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잊고 있던 것들을 모두 기억해내었다.
아아...어머니...
어린 자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어머니의 죽음을 막아보고자 상처를 치료해보고 깨끗하게 수건으로 닦아보기도 하고,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수련에 나오지 않는 자신을 의아하게 생각해 데리러 온 사부님에 의해서 상황이 정리되고 난 뒤였다.
어머니의 시신은 사부님이 따로 처리하셨고, 자신은 속이 텅 빈 인형처럼 사부의 손을 잡고 마을을 떠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자신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마을을 떠났다는 단편적인 기억 외에는 모두 잊게 되었다
그저 어머니가 없다는 아픔을 잊기 위해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년 자신의 생일 즈음해서 악몽을 꾸게 되었고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아..."
모든 기억을 되찾고 나니 자신의 무력함과 멍청함이 지독하게 혐오스러웠다
잊는 것으로 아픔을 외면하다니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었고 꽉 진 주먹에서 붉은 핏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후회를 한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리고 어머니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가장 아래 서랍 속 상자
빛이 바래있는 굳게 닫힌 작은 상자는 오래되어서인지 조금 힘을 주어 뒤틀자 열렸다.
상자 안에는 로켓 목걸이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작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힌 편지에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이렇게 잘 자라주어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자는..그런 내용이..
자신에게 어울릴 것이라며 산 은빛 로켓은 열자 안에는 사랑한다는 글자가 새기어진 어머니와 자신이 웃고 있는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분명 생일 몇일 전 화가에게 부탁해 그린..
초상화가 보고 싶어 어머니께 말씀드렸지만,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아 받지 못하였다고...
"..어...머니..."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자신은 좀 더 빨리 찾아올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지...
왜... 도대체...
작은 로켓을 품에 끌어안은 채 조용히 숨죽여 눈물만 흘렸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