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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달맞이꽃 -1-

2017. 2. 22. 23:41 | Posted by 아뮤엘

“좋아하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관심 없다.”


꽤 단호한 거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는 익숙해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들고 있던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곤 내일보자며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혀가 아릴정도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인한 피로감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처리하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서류더미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뻐근한 몸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어주었다. 시계를 보니 4시가 조금 지나가는 시각이었다. 


서류도 다 제출하고 승인까지 받았겠다, 다른 일도 없으니 조금 이르지만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고 겉옷을 걸쳤다.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지갑까지 챙기고 방문을 나서자 조노비치의 얼굴이 보였다.


“벌써 퇴근 하는 거야?”

“설마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런 일로 찾아온 거 아니니 걱정마. 그렇지 않아도 일찍 퇴근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온건데 전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서 말하려던 참이라고 대충 둘러대며, 방문을 잠갔다. 내일 보자며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시작은 그래, 별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전날 연이은 야근을 배려하듯, 일찍 끝난 업무에 알과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단골 식당에 들렸다 나오는 길, 오랜만에 별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사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상쾌한 바람과 함께 별들이 맞이해주었다. 오랜만의 휴식인데다가,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생도시절이야기, 회사에서 있었던 일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어느새 늘어난 술병들로 인해(집에서 술을 더 가지고 올라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알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렉스. 혹시라도 이 긴 전쟁이 끝난다면, 뭘 할 예정인가?”

“흐음... 글쎄다? 만약,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모든 걸 내려놓고 긴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이라... 여행도 좋지, 그래.”


들고 있던 잔을 내용물을 비우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 잔에 남은 술을 따라 마셨다. 별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날따라 술은 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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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Ricardo

2016. 11. 18. 00:12 | Posted by 아뮤엘

눈이 내린다.

너를 닮은 새하얀 눈이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색색의 건물들은 새하얗게 물들어가고 크고 작게 들리던 소리도 하나둘 가려져 갔다.


11월 17일

너와 내가 만난 날.

처음으로 이름을 가지게 된 날.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생긴 날.

처음으로 친구라는 존재가 생긴 날.

너와의 긴 인연이 시작된 날.


뽀득-

걸을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왠지 정겨웠다. 생각해보니 생일에 눈이 내리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그리운 추억들….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래 마피아에 거두어지기 전까지는 언제나 둘이 함께였다. 그러다 우리를 눈여겨본 그들에게 거두어지고 나서는 조직 원들이 축하해 주었다. 너는 언제나 따로 방을 찾아와 생일을 축하한다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날은 너와 같이 잠을 자는 날이었다. 뭐 이건 네 생일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더 크고 나서는 카포로서의 일이 바빠 서로의 생일을 챙기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다른 이들의 축하는 필요 없었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바빠도 조금 늦은 시각이라도 서로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런 날 중에서도 눈이 내리는 생일은 언제나 특별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모든 일을 미루어두고, 약속이라도 한 듯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그리고 너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에서 밥을 먹고, 너의 집에서 와인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너에게 우리는 이미 끝난 연일 텐데, 나는 눈이 내린다는 이유로 하던 일을 내려놓고 집을 나섰다. 큰길을 벗어나 좁고 좁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고 나서야 작은 공터가 나왔다. 버려진 옷가지와 벽돌 따위로 만들어진 작은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거리에 버려져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던 우리가 살았던. 둘이서 살 집이니 바람이나 비에 무너지면 안 된다고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녀 재료를 주워와 공들여 만들었었다. 겨우 만든 집은 며칠 살지도 못한 채,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우리는 옛 추억을 그리듯 종종 이곳을 찾았다. 지금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은 집이지만 예전이 그리워져 몸을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집 안에는 색색의 조약돌과 쓰레기만이 남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것들도 있는걸 보면 집을 잃은 고양이가 가끔 쉬어가는 쉼터가 된 모양이었다. 씁쓸해지는 마음을 삼키고, 커지는 하얀 눈송이에 근처 건물 아래로 들어가 눈을 피했다. 네가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미련이 이곳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으니까, 춥지 않으니까 좀 더 기다려 볼까? 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새하얗던 세상이 어둠에 잠식될 때까지 너를 기다렸다. 


 드문드문 들려오던 소리와 건물의 불빛이 하나둘 사라져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추위에 굳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굳은 몸을 간단히 풀고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왔다. 어두워진 거리에는 흐릿하게 빛나는 가로등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정말 떠나버린 거구나. 아릿해져만 오는 가슴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나를 거부한다고 하여도 난 널 지켜야 했다. 그 어둠으로부터. 그게 날 구원해준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답이었기에. 다만, 이 아파지는 마음을 난 어찌하면 좋은 걸까? 떨구어진 머리가 초라해진 나의 그림자를 더 작게 만들었다. 눈 위로 툭툭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고요한 거리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뽀득- 뽀드득-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익숙한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손길을 따라 옮긴 시선 끝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네가 있었다.


“여전히 미련하군. 포기라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유를 묻는건가? 그렇다면 답해주지. 생일 축하한다, 리키”


제 품에 안긴 그의 따뜻한 온기를 나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게 꿈은 아닐까? 네가 혹시나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리고 그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아아,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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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에 긴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안심되었던 것일까? 지독한 악몽은 찾아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어가는 시각, 쓱 방을 둘러보니 메이드가 두고 간 것인지, 간단한 아침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배가고파오긴 했지만, 뻐근한 몸을 풀고 싶었기에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물에서 몸을 풀고 있자니 배가 고파 결국 아침 식사를 욕조에서 먹고 말았다. 몸도 풀고, 고픈 배도 채우니 일석이조였지만, 그 모습을 유모에게 들켜 혼이 나고 말았다. 30분가량 혼이 났을까? 그제야 본 목적이 떠올랐는지, 유모는 빨리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가라는 말을 전하고 방을 나섰다. 물론 나서면서 다시는 욕실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하지 말라 단단히 일렀다. 유모에게는 일단 알겠다고 답을 하고 방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단순한 와이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집무실로 가는 길, 주방에 들려 아침 식사가 놓여있던 그릇을 반납했다. 점심은 조금 늦게 먹고 싶다고 주방장에게 이르고 도착한 집무실에는 작은 형과 큰 형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오랜만에 만나는 형들은 반가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뒤이어 들어온,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인물이 그 대화를 막았다.


“호오, 그 작던 아이들이 많이도 컸구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숙부님.”

“…….”

“…….”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는지 뒤룩뒤룩 찐 손을 내미는 숙부를 보며 큰형은 사무적으로 인사를 나눴지만, 작은 형은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고 나는 그대로 쇼파에 앉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작은 형처럼 자리를 박차 나가고 싶었지만, 이 인간이 왜 왔나 궁금해 자리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와 말을 섞을 생각은 없었기에 집사가 가져온 차를 따라 마셨다. 그런 우리의 태도에 숙부는 기분이 상했는지 빠득 이를 갈았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 작던 삼 형제가 많이 컸군. 무가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윗사람에 대한 예절은 더 배워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타계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혼란스러워 그런 것이니 ‘어른’이신 숙부님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끌끌. 그래, 어른인 내가 이해해야지.”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꺼운 손으로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숙부는 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건, 나와 다른 분가들의 의견을 담은 제안이다.”


큰형은 봉투에 든 종이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접어 봉투에 다시 넣어 숙부 앞에 놓았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집사, 숙부님이 돌아가신다고 하는군. 배웅해드리도록.”

“네놈! 그러고도 네가 내 도움 없이, 이 가문을 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마차 떠나면 소금 좀 뿌리는 것도 잊지 말고!”

“이글, 말이 지나치다.”


얼굴을 붉힌 채, 역정을 내는 숙부를 끌고 나가는 집사에게 말을 덧붙였다. 한숨을 내쉬는 형과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숙부를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빈 잔에 차를 따랐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액체를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샘이 마르고, 억지로 참은 탓에 목이 감겼을 무렵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


 축축해진 소매가 거치적거려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닦았다. 눈가가 불게 물든 채 부어올라 천이 스칠 때마다 아파왔다. 몸도, 마음도 걸레 조각이 되었기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일찍 잘까? 침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 올린 물건은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그 와중에 놓지도 않고 들고 온 자신이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나중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기장을 비밀 서랍장에 넣었다.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사이 시트를 정리한 것인지 뽀송뽀송한 촉감의 이불이 자신을 반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다 깨는 것의 반복을 통해 지쳐 무척이나 얕은 잠에 빠졌다. 주변이 무척이나 고요했기에 그 고요하던 공기가 불청객으로 인해 흐트러졌다. 누굴까? 궁금했지만, 감긴 두 눈꺼풀이 무거워 뜰 수가 없었다. 눈꺼풀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그냥 누워있길 선택했다. 사실 자신에게 적의가 없어 보이는 것이 제일 컸다.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은 불청객은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굳은살로 인해 거칠지만, 무척이나 따뜻한 손길. 나는 이 손길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일로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냥 방으로 가서 쉬지. 가슴 한편이 불편해져 잠결인 척 돌아누웠다. 그런 제 맘을 아는 것인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무책임했구나. 미안하다.”

형이 왜 사과하고 있는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다정한 손길에 이끌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조금만 버텨다오. 곧 마무리될 터이니. 모든 일이 끝나면 셋이서…….”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전해지지 않은 채 어둠에 잠식되었다.

 가문의 기둥이었던 두 분이 없다. 그 사실만으로 모두가 힘들어했다. 큰형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업무와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이른 나이에 즉위하게 된 부담감 때문일까?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이 많다며 최소한의 식사, 수면 시간 등을 제외하고서는 집무실과 서재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작은 형은 방문을 잠그고 자신을 가뒀다. 방 앞에 음식과 형이 원한 물품들이 담긴 트레이를 놓으면 빈 접시와 필요 물품이 적힌 종이를 놓는 것으로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하였다. 형들이 걱정되어 찾아가 봤다. 한눈에 봐도 수척해진 큰형은 자신에게 괜찮냐고 물어왔고 작은 형은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칼들이 연주하는 레퀴엠에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막내 도련님은 괜찮으십니까? 집사장이 물었다. 나는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지. 하루에도 수십, 아니 수백 번은 생각한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부모님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신다는 걸 막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 가족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들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후회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잠시 눈을 붙이면 악몽이 찾아왔다. 꿈은 항상 똑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숲을 뛰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살기 위해 뛰고 또 뛴다. 하지만 길의 끝은 보이지 않고 결국 지쳐 어둠에 먹히는 것으로 끝났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불쾌하기보단 그저 두려웠다. 형들도 부모님처럼 사라져서 혼자 남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에 몸을 끌어안았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축축해진 시트와 옷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토스트를 입에 물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앉아 남은 음식을 먹으며 머리를 말렸다. 짧은 머리라 그런지 식사를 끝마쳤을 무렵에는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다 먹었으니 움직여볼까?”


식기들을 트레이에 옮겨 그대로 끌고 나갔다. 1층 식당에 도착하니, 도련님~하고 부르며 집사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생겼나? 트레이를 근처에 있던 메이드에게 부탁하고 집사장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걷고, 또 걸어서 저택에서 살았던 자신이 처음보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따라 간 곳에는 커다란 문이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 곳에는 역대 조상들의 얼굴이 맞이하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니 초상화뿐만이 아니라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들도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그 사람을 나타냈던 물건들을 같이 전시한 것 같았다. 호기심이 발동해 방 안을 둘러보는데 집사가 헛기침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제야 이곳에 온 목적이 궁금해졌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왜냐면 이곳이 만약 역대 가주와 그의 부인의 초상화와 물품이 있는 곳이라면 이곳에 없는 것이 있었으니까. 자기 생각이 적중했는지 집사는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자신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보통이라면 큰형이, 큰형이 바쁘다면 작은형이 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지금은 두 형이 모두 힘든 상태였다. 큰형은 일 때문에 바쁘고 작은 형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나마 괜찮은 내가 부모님의 물품을 정리하여 이곳에 초상화와 함께 보관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다행히 초상화는 생전에 그려놓은 것이 있어 그것을 놓기로 하였지만, 문제는 부모님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되물어 봤지만, 답은 없었다. 그래 이렇게 끙끙 앓으며 피하느니 차라리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나을테지란 생각에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일손이 비는 집사와 메이드를 불렀다.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부모님의 방과 집무실 등으로 나눠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일단 부모님의 방을 들려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형들과 찾아온 방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검을 배우면서 발걸음을 멈춘 곳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방보다는 어머니가 아끼시던 정원이나, 서재에서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며칠 사이 뽀얗게 먼지가 내린 방안을 보며 가슴이 저려왔다. 가만히 서 있으면,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어머니가 아끼던 보석함, 아버지가 아끼시던 술들, 그리고 어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일기장…. 주류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던 술만 전시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큰형에게 보냈다. 보석함은 통째로 보관하기로 하였고 일기장은 내가 따로 챙겼다.


 하나, 둘 저택 곳곳에 남겨진 부모님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추려낸 물건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방을 나섰다. 뒤따라오던 집사장이 말했다. 무리할 필요 없다고. 그 속에 품은 뜻을 잘 알기에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미소로 답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평소와 같이 소리를 내 웃어 보이고 싶어도 미소를 짓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괜찮지 않구나, 나. 풀리는 다리, 자꾸만 힘이 빠지는 신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흘리듯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방을 향해 달렸다. 다른 이들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푸른 빛이 도는 은백색의 아름다운 꽃

이 꽃은 처음 가문을 세운 조상께서 사랑했다는 여인이 묻힌 자리에서 피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슬피 우는 그가 안쓰러웠는지 새벽이슬을 머금고 핀 꽃은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저택으로 돌아가 일단 휴식을 취하자는 다른 이들의 말에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며 꽃잎이 상할까 조심스레 채집해온 꽃은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사라져버린 꽃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에게 찰나의 행복을 보여준 이 꽃에게 가문의 이름을 따 '홀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보는 자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이 꽃은 생김새도, 피어나는 장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이야기만 전해져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유모에게 자주 들었던 꽃의 전설은 어린 자신과 형들에게 호기심 대상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떠한 행복을 가져다줄까?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른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라며 쓴웃음을 지으셨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기에 어른들도 아직 못 봤나 봐! 하고 넘겼지만 16살이 되던 해 왜 어른들이 그러셨는지 알게 되었다. 대가 없는 행복은 없는 법, 그래 언제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였다. 왜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항상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오랜만에 바쁘신 부모님과 형들이랑 외출하게 되었다. 가족에게 소홀히 해서 미안하다며 아버지가 시간을 내셔서 바닷가에 있는 별장에 놀러 가게 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함께 놀러 간다는 사실 하나로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산책이나 할까…?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켜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연못 가까이에 다다랐을 무렵, 달빛에 비쳐 은은하게 빛나는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기가 감도는, 달빛으로 인해 아름답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사라질듯한 분위기.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꽃이 이야기에만 나오던 그 꽃일 거라는 것을. 가져가 보았자 사라질 게 뻔했기에 제자리에서 소원을 빌었다. 행복한 여행길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별 탈 없이 다녀올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의 소원에 답이라도 하듯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꽃을 보고 작게 미소를 답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잠자리로 향하였다.


 꽃이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가족끼리 간 여행에서의 일정은 사고 없이 즐겁게 마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형들과 먼저 저택으로 돌아왔다. 잠시 들릴 곳만 들려 바로 따라오신다던 부모님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별일 아닐 것이 분명하니 기다려보자는 큰형의 말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형들도 걱정에 푹 잠을 자질 못했는지 수척한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식당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새하얗게 질려 달려오는 집사의 표정에 우리는 직감했다.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집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이제는 부모님과는 만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돌려 말하고 있지만, 그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작스러운 산사태가 마차를 덮쳐 그대로 파묻혔다고 한다. 주변의 인력들을 끌어다 흙을 파헤쳐 보니, 부모님은 안 계시고 부모님의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만 발견되었다고 말하였다.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살아계실 확률도 있다며 작은 형과 나는 열심히 부모님의 생사를 주장했다. 큰형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견에 동의하는지 재수색을 요청하였다. 끈질기게 물고 매달렸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서 부모님이 곁에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매달렸다. 돌아가셨을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였다. 그래, 그 강하던 부모님이 고작 산사태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결국, 수색 일주일 만에 흙투성이가 된 부모님을 찾을 수 있었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부모님의 모습에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죽음을…. 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사망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산사태로 인한 사고사가 두 분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 두 분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필요한 의식들을 잘라내고 이틀에 걸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몇몇 가문의 가주들과 지인들을 불러 간략하게 식을 치렀다. 뭐 간략하게 치른다고 하였지만, 알리진 않았어도 어디서 알고 온 건지 쥐새끼처럼 찾아온 방계혈족이 찾아와 식이 너무 단출하다, 형님이 위에서 화를 내시겠다, 이래서 어린 애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따위의 소음을 지껄였다. 쫓아내고, 쫓아내도 어디로 들어오는 것인지 결국 초대했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모든 이들을 저택에서 내보내고 나서야 겨우 조용해졌다. 어둠이 찾아올 새 없이 화목하고 웃음이 넘쳤던 예전과 달리 무거운 어둠이 지배하는 저택에는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루드이작/루드작] Erlösung -2-

2016. 10. 27. 00:23 | Posted by 아뮤엘

 [절망 속에서 내밀어진 작은 손은 무척이나 눈부셨다. 바닥으로, 아니 그보다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만 하던 나날이 즐거워졌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쫓겨 다녔다. 이유는 모른다. 어머니조차 그를 외면했지만, 그의 자식이라는, 가족이라는 꼬리표는 항상 우리를 따라다녔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지만, 꼬리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책임지지도 못할 씨앗들을 뿌려 놓은 덕에 우리 가족은 언제나 가난했다. 남의 집 일을 하느라 얼굴조차 보기 힘든 어머니,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낡은 집은 더러워졌고 냄새까지 나기 시작했다. 첫째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 가끔 물을 길어 강가에 나갈 때면 돌을 던지는 아이들, 숙덕거리는 마을 사람들로 인해 아주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각에 나갈 수 있었다.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상황이. 나는 더럽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매일 이렇게 상처가 나도록 몸을 닦고 닦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며 배척하고, 돌을 던졌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나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존재인데 왜 나만? 그 설움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동생들 앞에서는 울 수는 없었다. 그래, 몸에 밴 습관들은 나를 끝까지 죄어왔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좁고 어두운 곳을 찾아 작은 몸을 숨기고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렸다.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새어나가는 울음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얼굴을 무릎에 품고 최대한 소리를 죽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자꾸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근처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에게 들키면 성가셔지니까, 재빨리 눈물을 닦고 도망치자는 생각에 대충 눈가를 소매로 잡고 일어섰지만, 자신을 붙잡는 손길이 더 빨랐다.


“천사님, 여기서 왜 울고 있어?”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사? 누굴 보고 하는 소리지? 설마 나인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붙잡힌 손을 빼내어 도망치려고 했지만, 제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남자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응? 대답 좀 해주지, 그래?”


아, 얼굴도 다시 보고 싶네~ 라고 덧붙이며 말을 걸어왔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나를, 피하지 않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도망가야 된다는 생각보다 상대가 누구인지 보고 싶어졌다. 그래, 왜인지 몰라도 가슴 한구석에서 그라면 믿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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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이작/루드작] Erlösung -1-

2016. 10. 25. 01:19 | Posted by 아뮤엘

 [내가 이 지독한 꿈에서 깼을 때, 잘 잤어? 라고 말하는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 십 번을 해. 이 모든 것이 꿈이고 사실은 둘이서 태양과 달이 잘 보이는 언덕 위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를 잠식하고 있는 불쾌한 기억의 시작은, 그래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된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 아주 어린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일 모든 일의 시작을 따지자면, 자신을 찾아온 한 무리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그러니 세상을 위해 자신들에게 맡겨달라고 말했다. 불길한 느낌이 드셨는지, 아버지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 방문자들을 잠시 문밖으로 쫓아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돈과 식량을 챙겨주고, 마룻바닥의 숨겨진 통로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멀리 도망가라고, 자신은 여기서 그들을 막을 테니, 아니, 곧 따라갈 터이니 걱정 말고 먼저 가라고 웃어 보이며 어머니와 자신을 차례로 포옹하고 그대로 통로의 문을 닫았다. 아버지도 곧 따라오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어렸던 나도 알았던 것 같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란 걸.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피해 도착한 마을에서 우리는 쉴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독일이 아닌 체코의 한 마을이었다. 마을의 한쪽은 강으로, 다른 한쪽은 숲이 있어 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어머니도, 나도 꽤 오랜 도망생활에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이만하면 추적자들도 포기했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사는 것도 좋았겠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다행히 숲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집이 있었다. 버려졌다? 라기에는 생각보다 깔끔한 집이었기에, 주위에서 나뭇가지와 흙을 주워다 부족한 부분만 수리하였다. 하루만 잔다고 한다면 그냥 자도 되겠지만, 살아야 했기에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옆에서 어머니를 도우다 마을로 내려가 필요한 식재료를 사 오는 것이 다였다. (다행히 마을에 오가는 사람은 많았는지 외지인에 대한 배척은 없었다) 가끔 입이 가벼운 상인들에게 얻는 정보도 있었기에 하루에 한 번씩은 마을로 내려갔다. 이것저것 얻은 정보는 많으나 보통 쓸모없는 내용이 다수였지만 유용한 정보도 다수 있었다. 예를 들면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집이 원래 살던 주인이 수도로 올라가면서 버렸다던가, 신흥종교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사실 정확한 의미 모를 이야기도 많았지만 귀담아들어 두었다 집으로 가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께 말씀드리곤 했다. 그럼 어머니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셨다.


 마을에서의 삶이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열매를 구분하여 딸 수 있게 되었다. 트랩을 만드는 것에도 능숙해져(마을 사람에게 배웠다.) 작은 짐승을 잡아와 요리해 먹기도 했다. 가끔은 어머니와 같이 강가에 가서 물놀이하다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어머니가 빨래하실 때면 마을 중앙 분수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이날도 평범할 것 없는 날이었다. 빨래하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분수대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끔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평범하게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오길 바라며, 앉아있는데 저 멀리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어 넘어갔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때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그날따라 그 작은 소음이 무척 신경 쓰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찾아간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는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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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Piano -1-

2015. 12. 28. 23:58 | Posted by 아뮤엘

 그의 집 거실에는 새하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언제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피아노는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다. 그래, 자신이 아는 한, 그와 알아온 그 긴 시간 동안 피아노는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가끔 피아노가 망가지지 않도록 그가 직접 조율하였다. 소중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공들여 조율을 하고 난 뒤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를 쓰다듬다 이내 제 시선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머리를 살짝 누르고 연구실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그의 시선을 항상 사로잡는 그 피아노가 얄미워 그가 잠시 외출하러 나간 사이 건반을 덮고 있는 덮개를 한쪽으로 치우고 뚜껑을 열었다. 그가 피아노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기에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매일 깨끗하게 피아노를 닦기 때문에 티클 없이 새하얀 건반이 나열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과 달리 가운데 부분의 건반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 잉크가 떨어졌었나? 평소 피아노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그가 했을 리는 없고…. 잉크가 아닌 무언간가? 솟구치는 호기심에 연분홍빛 건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익은 냄새가 제 코끝을 스쳤다. 비릿한 냄새. 옅지만 이 냄새가 자신이 익숙히 아는 그것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인가?"

“…. 누구 멋대로 피아노에 손대래!!"

자신을 거칠게 밀쳐내는 손길에 바닥에 엉덩방아 찧고 말았다. 둔부를 타고 올라오는 가벼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올려다본 렉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자신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온 그가 오늘따라 얄밉기도 했지만,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일을 몰래 하다 걸렸으니 자신의 잘못이 컸다.

"미ㅇ..."

"...됐고 물건 덜 사온 거 같으니까 가서 사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알겠다고 말하며 지갑과 겉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그는 작게 어깨를 떨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문을 닫고 한 계단 두 계단 내려오다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우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그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필요할 때만 말을 걸어왔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와 같이 보낸 수년간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생도 시절 밖에서 온 연락에 급히 뛰어갔던 그가 늦은 밤 붉게 물든 눈으로 들어왔던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폭풍전야처럼 느슨한 듯, 팽팽하게 지속되던 분위기는 집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그는 그대로 특유의 벽을 치고 있었기에 사무실 내의 공기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빨리 일을 하라고 소리쳤을 조노비치양도 첫날 렉스에게 잔소리를 한 뒤, 재촉을 포기하였다. 평소라면 장난치듯 짜증을 내며 답했을 그와 달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반응에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다른 동료들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르겠다고 모르는 척 대답하는 것밖에는...


 분위기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고 결국 조노비치양이 폭발하였다.

“당신,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거 다른 사람에게 피해인 건 알고 있지?”

“......”

“불만이 있으면 당사자랑 해결을 보던가 왜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해?”

“아, 그래? 미안”

“하,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

“그럼 지금 여기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풀려? 그리고 이럴 시간에 네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 지금 말 ㄷ...”

“미안하네, 조노비치양.”

그녀의 손에 작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서야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렉스를 자리에서 끌어내었다. 아니 끌어내려고 하였다.

“뭔데? 네가 왜 사과를 해?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냐?”

자신의 손을 단호하게 쳐내는 그의 손길에 멈칫하였지만, 그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조노비치양 말대로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기에 주변에 큰 피해를 주었고 렉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깨닫는 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시발, 야. 안 놔?"

잡힌 손목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를 애써 외면하고 옥상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장소를 벗어나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까? 그가 할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말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등이 얽혀 정작 하고 싶었던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목적지였던 옥상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찼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는 렉스와 자신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겠다, 그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새끼... 힘만 세서 붓게 생겼네.”

렉스는 자신이 잡았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은 손을 숨겼다.

“미안...하네. 많이 부었나?”

“네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뭐냐, 날 데리고 나온 이유가?” 평소라면, 아니 예전 같았으면 네놈 때문에 죽겠다며 대신 일 하라고 말해왔을 그인데 선을 긋는 그의 모습에 망설여졌다. 괜찮은 걸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지?

“뭐야? 보아하니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인데, 생각이 정리되면 말하던가.”

근처 벤치에 앉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목에 걸린 십자가를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네.”

“뭐가 미안한 건데? 네가 딱히 미안해할 게 있던가?”“자네의 상처를 건드린 것도, 자네를 울린 것도, 그리고 자네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모두 미안하네.”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도망쳤냐?”숙인 고개 사이로 꾹 다문 입술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 자네가 더 힘들어할까 봐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으로 피하려고 했네.”

“하, 평소엔 그렇게 용감하고 눈치 없는 놈이?”“상처받은 자네에게 내가 다가감으로써 더 큰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씨발. 진짜, 좆같게.”

그는 붉게 부어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작게 흔들리는 어깨와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가 울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어깨를, 무너져 내린 그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며 다독여주었다. 그래, 다시는 그를 울리지 않겠다고 맞닿은 체온에 맹세하였다.


 그 날 이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실의 분위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잔소리하는 조노비치양과 그걸 장난스럽게 넘어가는 렉스,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전보다 더 활기차진 것 같았다. 회사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렉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 같았으면 서로 피하고 모르는 척 넘어갔을 것들을 서로 감싸주게 되었다. 지난 일로 서로 오해를 하고 상처받고 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크루그먼의 배려로 일찍 퇴근하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고 쉬기 위해 소파 앉아있는데 렉스가 양주를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건넸다. 한 잔, 두 잔 말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라왔다. 눈앞이 흐릿해져 갈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도 취해있는 상태라 띄엄띄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상심에 빠져있던 그를 도와준 알비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생도 시절 휴일마다 빠져나가 만난 사람 또한 그 알비라는 남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병이 있었는데 그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숨기는 것이 없냐고 물어왔지만, 이미 그에게 다 말해주었기에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싱겁다는 듯 투정을 부리다 이내 제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저 피아노가 알비라는 사람의 것이었다는 것과 생도 시절 렉스가 급하게 외출했던 것이 그와 연결되어있다는 것 등 알비라는 사람이 드렉슬러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었다. 분하지만, 이미 멀리 떠난 이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신이 렉스 안에서 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지 말이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 피아노는 저렇게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았기에 새하얀 피아노는 장식용으로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선을 그어놓은 듯 그 선을 넘어가려고 하면 그는 자신을 거부하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완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계절은 흘러 푸르던 나뭇잎들이 화려한 치장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회사에서 긴 야근 주간이 끝난 기념으로 오랜만에 그와 같이 요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집에 있는 식재료로 미리 준비하기로 하고 자신은 필요한 물품을 장보기로 하였다. 자주 가는 가게에 들려 종이에 적혀있는 식재료들을 사고 나서는데 점원이 서비스라며 사탕이 들어있는 작은 병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안 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단골손님 서비스라는 그녀의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렉스가 기다리고 있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맛있는 냄새가 제 코를 자극하였다. 재료만 손질한다더니 결국 요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품에 안은 식재료들을 안고 부엌으로 향하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고 있던 식재료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육수를 내는 그의 뒤로 가 꼭 끌어안았다.

“왔냐?”

“아아, 무슨 요리를 하려고 육수를 내고 있는 건가?”

“네가 파에야 먹고 싶다며, 싫으면 하지 말까?”

“싫을 리가 있나.”

“그럼 육수 좀 보고 있어. 나는 네가 사온 재료 좀 다듬으련다.”

제 품에서 벗어나 식재료가 담긴 봉투 쪽으로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육수가 잘 우러났는지 확인을 하고 야채를 볶기 위해 팬에 기름을 두르는데 렉스가 무언가를 들고 제 쪽으로 다가왔다.

“야, 이건 뭐냐?”“아아, 그거. 가게 점원이 단골 선물이라며 주더군. 사탕 같던데 자네 피곤할 때 먹으면 좋지 않을까?”

“흐음.. 한 번 먹어볼까?”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자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렉스는 사탕하나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입에 넣었다.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내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무진장 달다. 너 못 먹겠는데?”

“달지 않은 사탕이 어딨나?”

“이건 꼬맹이들이 즐겨 먹는 것보다 더 단데? 어, 이거 사탕 안에 시럽 같은 것도 들어있네?”

“그 정도인가? 그것보다 시럽이라니 신기하군.”

사탕 안에 시럽이 들어있다며 신기하다고 하나 더 꺼내먹는 렉스를 보다 하나 먹어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으나, 꼬마 아가씨들이 즐겨 먹던 사탕의 단맛을 떠올리니 맛보려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맛있게 먹는 렉스를 보니 굳이 먹을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육수도 다 우러났고 야채를 볶는 과정도 끝났기 때문에 가스 불을 끄고 빈 그릇에 옮기는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큰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놀라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니 렉스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머리가 굳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풀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잡아 전화기를 잡았다. 주치의의 번호를 떠올리며 번호를 입력하였다. 제발... 빨리 전화를 받길.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는 주치의에게 렉스의 상태를 설명하니 그는 최대한 빨리 갈 테니 도착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렉스를 똑바로 눕히고서 주치의가 말한 대로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괜찮을 거라고 주치의가 와서 그를 살려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치의는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놓아주라고, 그는 이미 떠났다고. 외면하고 싶었다. 감긴 두 눈이 장난이었다는 듯 자신이 좋아하던 푸른빛을 다시 한 번 빛내며 자신을 담길 바랐다. 차갑게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그를 나는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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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empaparse

2015. 10. 11. 03:32 | Posted by 아뮤엘

철이 들었을 무렵,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가문에 대해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다 부질없다고 느껴졌으니까. 부모님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자신을 한계까지 내몰았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고 나면 잘했다, 그래야 내 아들이지.라고 말하며 다음 목표를 내밀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따뜻했으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주었으니까. 주변에서는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다. 어린 나이에 창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난데, 지식을 습득하는 것 또한 뛰어나다며 자신을 칭찬하기 바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동경, 두려움, 악의, 견제 등이 섞인 시선은 자신을 지치게 하였지만, 부모님이 지어주는 그 미소에 목말라 있던 나는 더더욱 노력하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날 바라봐 주실 거야. 날 사랑해주실 거야. 그렇게 믿고 있었다.

세 살이 되던 해였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들로부터 더는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더 좋은 선생님들을 데리고 올 테니,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끔 주어지는 휴식시간이 좋았다. 아버지가 정한 일정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나는 재빨리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책꽂이에서 별에 대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찾아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지고 왔다. 별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며 배우는 걸 금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방에 있는 책이라곤 별에 관련된 동화 한 권뿐이었다. 아버지의 눈에 닿지 않게 책 사이에 잘 숨겨놓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들키지 않았다. 만약 들켰다면 바로 압수당하였을 것이다. 가져온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니 어떻게 숨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분명 책장에 꽂으면 들킬 것이 분명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였다. 침대 밑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길게 늘어진 이불을 살짝 걷어내고 침대 밑에 가져온 책들을 넣었다. 걷어내었던 이불을 내려 잘 가려졌는지 확인하고 책장에서 창에 대한 책을 꺼내 들어 소파에 앉았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가져온 책들을 읽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황이라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기로 하였다. 창에 관련된 책도 좋았으니까. 한 장, 두 장 넘기기 시작한 책은 벌써 끝을 달리고 있었다. 창의 쓰임새와 사용방법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어 좋았지만,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창을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면...”
펜을
쥐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새로운 선생님을 구해왔다며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되니 일찍 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잠을 자는 시늉을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침대에서 나왔다. 밑에 숨겨 놓았던 책 한 권을 꺼내 흐릿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 별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위대하고 흥미로운 세계였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혼자 공부하기 시작한 별의 세계는 자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가 새로 데려온 선생님이 앞에서 뭐라고 하던 자신의 머릿속에는 별로 가득 차 있었다. 별들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저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은 더해갔다. 별에 빠지면 빠질수록 다른 일들에 소홀히 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보고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꾸짖었다. 생각이 있냐며,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말이 주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홀린 듯 나는 아버지께 처음으로 내 의견을 말하였다. 천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별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말한 내 의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아버지는 그런 쓰레기 같은 학문으로 무얼 하려고 하냐고,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 따위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기사학교에 들어가 기사가 될 준비나 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듣고 방으로 돌아왔다. 뭔가 부자연 스러운 방...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 밑으로 들어가니 숨겨 놓았던 책들이 다 사라졌다. 책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하기 위해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집무실의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숨을 죽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대화의 내용은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가문의 흠이 되기 전에 빨리 학교에 보내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학교에 보내느니 자신들이 직접 감시를 하며 가르치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대답하고 있었다. 아아.. 내 편은.. 없었던 거구나. 그저 가문의 명예를 중시해 자신도 가문의 명예를 위한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더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짐을 쌌다. 자신은 그 찰나의 미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자신은 그저 그들의 장식품이었다는 사실이,그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면하기에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 그저 이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집사를 통해 기사학교에 들어가겠다고 아버지께 말을 전하였다. 아버지는 가서 정신 차리고, 가문에 흠이 가지 않도록 타인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래, 저택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어린 자식이 저택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나는데도 자식에 대한 걱정보다는 가문을 더 신경 쓰는 부모님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그 작은 미련마저 사라졌다.

기사학교에 들어가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가문을 보고 달라붙는 이들을 보니 짜증이나 작게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라 수업시간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학교의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직 가르치지 않은 내용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 했지만 역으로 자신이 틀린 부분을 지적했더니 그 뒤로 자신을 건드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학교 내에서 자신의 악명은 쌓여만 갔고, 가문에서도 편지가 날라왔지만, 편지는 좋은 땔감이 되었다. 거기다 2인 1실이 기본인 기숙사에서도 다들 자신과 같이 방을 쓰는 것을 꺼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혼자서 쓰게 된 것도 좋았다. 시간은 흘러 15살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죽이 맞는 선생을 만나 자신이 몰랐던 영역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수확이었다. 직접 창을 만들어보기도 하였으며 밤하늘이 맑은 날이면 망원경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별들을 관측하기도 하였다. 저택에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즐기며 나만의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주변에서는 자신을 괴짜,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춰 사는 것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렸으며, 타인의 시선 따위는 이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 내가 원했던 것들이었을 텐데 창밖을 보면 삼삼오오 모여 노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한구석을 타고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에 창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눈을 감고 그 감정을 잊고자 잠을 청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최소로 하며,자신이 가진 상처를 숨기고자 가슴 깊숙이 숨기고 숨겨 수많은 자물쇠로 꼭꼭 잠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하였다. 숨기는 것이 익숙해져 이제는 덤덤해졌을 무렵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2살 어린 올곧은 눈을 가진 알베르토 로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너. 소설 속에 나오는 기사처럼 정의를 실천하는 기사가 되고 싶다던 너는, 나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다들 기피하던 나와 같이 방을 쓰겠다고 나서는 너의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쳤었다.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보다 배는 심하게 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트집을 잡거나, 너의 물건을 어질러 놓는 등의 행위들. 너는 그때마다 나를 찾아와 또박또박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로 해달라며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로운 창을 연구하고 있자면 어느 순간 옆에 앉아 의견을 덧붙이기는 너의 모습에 놀라 저리 꺼지라며 연구노트를 숨겼지만, 너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순간부터 연구할 때 네가 옆에서 조언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가와 나의 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꺼지라고,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외면하여도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는 너의 모습에 나는 조금씩 너에게 물들어갔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간단하게 풀고 옆에서 잠든 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려 보인다고 놀렸더니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는지 조금씩 기르기 시작한 수염. 살짝 흐트러진 고동색 머리카락과 감긴 두 눈. 매일 자신에게 마법이라도 걸듯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입. 조금씩 나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던 너는 결국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자물쇠로 꽁꽁 잠가 숨겨두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풀어나갔다. 소중하다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깨달았을 때는 하나의 자물쇠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곧 너의 손에 열렸지만.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

굳게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 눈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사랑하네, 렉스”
“..아아
, 나도 사랑한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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