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 01:23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로라드렉] 로라드렉 2/14일 합작

2016. 1. 19. 19:41 | Posted by 아뮤엘

 너와 나의 관계는 언제나 그랬다. 그래,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처럼 타인이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연인의 모습을 우리는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물어봤다. 너희 둘 이러다 결혼하는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냐며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그의 미래엔 내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뭐 같은 일이었기에 떠올리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우리는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서로 같은 성별을 가진 이들의 사랑이라서? 주변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여서?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저 둘만의 시간을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했으니까. 불쾌하다.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머리 아프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더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두통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몰려오는 수마에 기대 생각의 늪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 깊은 어둠 속에 잠식되었다.


 눈을 뜨니 벽에 걸린 시계가 흐릿하게 보였다.

“11시...20분?”

아...망했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빌어먹을 회사라던가, 일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회사에 단 한 번도 지각을 해본 적도, 일을 게을리 한 적도 없는 저였기에 지금 이 상황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지각도 지각이지만 늦잠이라니? 눈을 비비고 다시 시계를 쳐다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 준비해서 씻고 회사를 간다 한들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오늘 별다른 일정도 없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불마녀의 잔소리도 잔소리지만, 그저 밖을 거닐고 싶었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하였다. 간단하게 씻을까 순간 고민을 했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도 그렇고 그냥 씻고 싶었다. 머리 위로 흐르는 찬물을 하염없이 맞고 있었다. 이러면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이 다 흘러 사라지지 않을까?

“...실없는 소리...”

차가워진 몸을 수건으로 닦고 욕실을 나서니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난 뒤라 그런지 고파오는 배를 안고 부엌으로 향하였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텅 비어있었다. 요 며칠 야근 때문에 밥 먹을 시간이 없었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다니... 생각해보니 욕실에 샴푸나, 휴지 같은 것들도 떨어져 있던 것이 떠올랐다. 집안일에 무심했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지만, 항상 도맡아 하던 이가 있었기에 딱히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아... 미치겠네.”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필요한 물품들을 종이에 적었다. 혹시 빼먹는 것이 있나 몇 번씩 확인하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사야 할 물품이 많았기에 다 들고 올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게 늘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마켓에 도착했다. 바구니를 들고 마켓 안으로 들어가자 신선함을 뽐내는 채소와 과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신선함에 이끌려 살까? 순간 고민했지만,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유통기간이 긴 통조림 따위를 주로 사고 신선한 과일 조금과 야채를 구매하였다. 이미 먹을거리로 가득 찬 바구니를 점원에게 부탁해 계산대에 맡겨놓고, 새 바구니를 들고 생활용품이 있는 곳으로 가 필요한 것들을 담았다. 필요한 것만 산다고 샀음에도 묵직해진 바구니를 보며 연구용품은 나중에 사기로 하고 돌아가는 길 베이커리에 들려 샌드위치와 바게트를 추가로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온 짐을 정리하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괜스레 그가 떠올랐다. 이번 출장지는 동양이라던데, 입맛이 까다로운 녀석이라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걱정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알아서 하고 돌아오겠지 라며 별생각 들지 않았는데 몸이 약해진 탓인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짜증났다. 샌드위치를 입에 털어 넣고 소파에 기대듯 누웠다.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가 떠올랐으니까,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혼자가 익숙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 무서웠던 걸지도 모른다. 마음을 주면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을 배신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자신을 바꾸어 놓았다. 그와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항상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어느새 빠져버렸다. 감추었던 감정들을 하나둘 일깨웠다. 조금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은 너라는 존재에게 침식당해 물들고 말았다. 이제 나라는 존재에게는 네가 전부인데,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어떡하면 좋지? 나는 네가 직접 표현해줬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날 너의 연인이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너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었는지 눈을 뜨니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 어슴푸레한 빛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굳은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불을 켜니 5시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보였다.

“으음... 어림잡아 10시간 정도 잔 건가?”

평소라면 운동을 하러 갔을 시간이지만, 어제 회사를 무단으로 결석한 것 때문에 쌓여있을 업무가 떠올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기로 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였다. 어제저녁을 먹지 않고 자서 그런지 평소보다 허기진 상태였기에 든든하게 먹을 생각이었다. 과일을 잘 씻은 다음 먹기 좋게 자르고, 딱딱해진 바게트에 마늘과 버터, 설탕을 섞은 소스를 발라 오븐에 살짝 구웠다. 소시지와 달걀까지 요리해 식탁 위에 올려놓으니 평소와 달리 풍성해 보였다. 요리하는 동안 내려진 커피를 곁들여 아침 식사를 하니 6시가 되었다. 그릇들을 깨끗이 설거지한 뒤,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말린 뒤, 평소대로 머리를 세팅하고 제복을 꺼내 입었다. 옷에 주름이 있는지 확인한 뒤, 서류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잘 정돈된 거리를 따라 걸으며 올려다본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다만 문제는...

“무단결근에 대한 처벌인가..?”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마녀도 마녀지만, 크루그먼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무거워지는 발을 겨우 이끌고 회사에 도착하였다. 빠르게 사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어둠이 감도는 사무실에 불을 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깨끗한 자신의 책상이었다. 무단결근을 했으니 어제 분의 서류가 쌓여있어야 정상인데, 왜? 자신에게 누군가가 설명해줬으면 좋겠지만, 사무실에는 그 궁금증을 풀어줄 이가 없었다. 일단 계속 서 있는 것보다 자리에 앉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개인 물품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여니 곱게 접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종이를 꺼내 펼치자 안에는 낯익은 필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아파서 쉰다고 설명했으니 걱정 마시길.’ 크루그먼인가. 어제 못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일찍 왔더니, 크루그먼의 배려로 할 것이 없다니. 나중에 고맙다고 술 한 잔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출근 시간이 되었는지 하나둘 늘어가는 목소리에 기지개를 켜니 주변에서 자신을 봤는지 괜찮냐는 질문이 날라왔다. 이제 괜찮으니 신경 끄라는 대답을 해주고 하나둘 올라오는 서류를 처리하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흘렀다. 쌓여가는 서류에 욕을 날리다가 불마녀에게 잔소리 듣고, 돌아가는 길 크루그먼과 홀든을 끌고 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 네가 없는 옆자리를 그리워하기도 하며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 초콜릿 향에 머리가 아파졌을 무렵이었다. 꼬마 아가씨가 선물이라며 주는 상자를 가방에 넣는데, 홀든이 어떤 여성이 자신을 밖에서 찾고 있다며 나가보라고 말했다. 자신을 찾아올 여성이 있던가? 가문과 관련된 사람이겠거니 하고 나갔더니 모르는 여성이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말하며 자신의 팔을 이끌었다. 여성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였고, 더군다나 장소가 회사였기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녀를 따라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서자 점원은 창가 쪽으로 안내하였다.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자신에게 무엇을 마시겠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괜찮다고 답하였다. 알겠다며 커피 두 잔을 내달라고 점원에게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오늘은 야근확정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데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베르토 씨와 친하시다고 들었어요.”

“...엉?”

“같이 동거를 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사실인데, 그게 아가씨랑 무슨 관련이 있지?

“저는 머지않은 미래에 그의 여자가 될 사람이거든요.”

당당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한 여인의 모습에 허탈해졌다. 그 녀석도 한 가문의 장자이니 약혼녀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그 녀석과의 관계에 대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고민이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애소설 속 상황이 재현될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결국 그 녀석이 입이 아닌 타인의 입으로 이별을 통보받는 것인가? 기분 참 더럽네. 살짝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자신의 모습에 확신을 얻은 것인지 여자는 말을 이었다.

“그에게 전해 듣지 못했나요? 다가오는 봄에 그와 결혼을 할 예정이거든요.”

“......”

“이제 전쟁놀이는 그만두고 그도 가업에 집중해야 하니까 회사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제 생각엔 당신이 걸림돌인 것 같아서 말이죠. 우리 그이에게서 떨어져 주시겠어요?”

“하아, 그래. 내가 떨어진다고 하면 얼마를 줄 예정이지?”“이 정도면 당신 복 받은 줄 아세요. 서민한테 이렇게까지 돈을 주는 거 흔치 않거든요.”

“서민? 내가 아무리 가문에서 제명당했다고 그렇지, 서민이라.”

“네?”

여인이 전해준 봉투에는 꽤 큰 금액이 적힌 수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금액 말인데, 내가 가진 재산의 1/10도 안 되는데 어쩌지? 저기 아가씨 소설을 많이 읽었나 본데 상대를 봐가면서 써야지. 예쁜 얼굴도 아닌데 머리도 나빠서 어쩜 좋아, 응?”

“ㅁ..무슨! 제가 누군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거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평소보다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인물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알베르토 씨! 저기 저 남자가!”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네? 얼마 전에 파티에서 뵈었는데...”

“아, 그것보다 레이디가 왜 여기에 이 사람과 같이 있는지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남편이 될 사람의 주변 잡초는 정리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누가 레이디의 남편입니까? 적어도 저와 그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하아? 무슨 소ㄹ”

“저는 이미 평생을 함께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레이디는 아닌 것 같군요.”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그의 말에 여성은 일어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꾹 다물고 울먹이는 여성을 보고 있자니 알이 제 팔을 이끌었다.

“야, 알? 잠시만 야!!”

“뭔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출장은 어쩌고?”

그를 본 것은 좋았지만 분명 다음 주쯤 도착한다던 그가 벌써 돌아오다니.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지금쯤이면 이곳으로 오는 배에 있는 것이 정상인데.

“아, 어느 여행자에게 도움을 받아 빨리 돌아올 수 있었네.”

“일은?”

“어제 보고도 다 했다네. 가장 먼저 자네를 보고 싶었지만, 자네가 회사에 없더군.”

“...집에 오면 되잖아.”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었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도착한 곳은 집이었다. 회사에 갔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과 쏟아질 잔소리에 대해 걱정을 하며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전보다 살짝 길어진 머리에 자신의 걱정대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는지 살이 빠져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출장 많이 힘들었냐?”

“가서 고민했네. 자네가 우리의 관계에 지루해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

“나는 두려웠네. 앞을 나가는 순간 변할 것들이.”

그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여행자가 그러더군. 변화를 두려워하는 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다만, 그것을 이겨내느냐 아니면 계속 두려워하느냐의 차이라고.”

이어 자신의 왼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몇 날 며칠을 생각해보았지만,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자네를 잃는 것이었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상자 속의 물건을 꺼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지에 끼웠다.

“나와 평생을 함께해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