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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Piano -1-

2015. 12. 28. 23:58 | Posted by 아뮤엘

 그의 집 거실에는 새하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언제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피아노는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다. 그래, 자신이 아는 한, 그와 알아온 그 긴 시간 동안 피아노는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가끔 피아노가 망가지지 않도록 그가 직접 조율하였다. 소중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공들여 조율을 하고 난 뒤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를 쓰다듬다 이내 제 시선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머리를 살짝 누르고 연구실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그의 시선을 항상 사로잡는 그 피아노가 얄미워 그가 잠시 외출하러 나간 사이 건반을 덮고 있는 덮개를 한쪽으로 치우고 뚜껑을 열었다. 그가 피아노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기에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매일 깨끗하게 피아노를 닦기 때문에 티클 없이 새하얀 건반이 나열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과 달리 가운데 부분의 건반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 잉크가 떨어졌었나? 평소 피아노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그가 했을 리는 없고…. 잉크가 아닌 무언간가? 솟구치는 호기심에 연분홍빛 건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익은 냄새가 제 코끝을 스쳤다. 비릿한 냄새. 옅지만 이 냄새가 자신이 익숙히 아는 그것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인가?"

“…. 누구 멋대로 피아노에 손대래!!"

자신을 거칠게 밀쳐내는 손길에 바닥에 엉덩방아 찧고 말았다. 둔부를 타고 올라오는 가벼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올려다본 렉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자신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온 그가 오늘따라 얄밉기도 했지만,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일을 몰래 하다 걸렸으니 자신의 잘못이 컸다.

"미ㅇ..."

"...됐고 물건 덜 사온 거 같으니까 가서 사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알겠다고 말하며 지갑과 겉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그는 작게 어깨를 떨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문을 닫고 한 계단 두 계단 내려오다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우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그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필요할 때만 말을 걸어왔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와 같이 보낸 수년간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생도 시절 밖에서 온 연락에 급히 뛰어갔던 그가 늦은 밤 붉게 물든 눈으로 들어왔던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폭풍전야처럼 느슨한 듯, 팽팽하게 지속되던 분위기는 집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그는 그대로 특유의 벽을 치고 있었기에 사무실 내의 공기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빨리 일을 하라고 소리쳤을 조노비치양도 첫날 렉스에게 잔소리를 한 뒤, 재촉을 포기하였다. 평소라면 장난치듯 짜증을 내며 답했을 그와 달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반응에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다른 동료들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르겠다고 모르는 척 대답하는 것밖에는...


 분위기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고 결국 조노비치양이 폭발하였다.

“당신,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거 다른 사람에게 피해인 건 알고 있지?”

“......”

“불만이 있으면 당사자랑 해결을 보던가 왜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해?”

“아, 그래? 미안”

“하,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

“그럼 지금 여기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풀려? 그리고 이럴 시간에 네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 지금 말 ㄷ...”

“미안하네, 조노비치양.”

그녀의 손에 작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서야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렉스를 자리에서 끌어내었다. 아니 끌어내려고 하였다.

“뭔데? 네가 왜 사과를 해?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냐?”

자신의 손을 단호하게 쳐내는 그의 손길에 멈칫하였지만, 그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조노비치양 말대로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기에 주변에 큰 피해를 주었고 렉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깨닫는 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시발, 야. 안 놔?"

잡힌 손목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를 애써 외면하고 옥상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장소를 벗어나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까? 그가 할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말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등이 얽혀 정작 하고 싶었던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목적지였던 옥상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찼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는 렉스와 자신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겠다, 그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새끼... 힘만 세서 붓게 생겼네.”

렉스는 자신이 잡았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은 손을 숨겼다.

“미안...하네. 많이 부었나?”

“네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뭐냐, 날 데리고 나온 이유가?” 평소라면, 아니 예전 같았으면 네놈 때문에 죽겠다며 대신 일 하라고 말해왔을 그인데 선을 긋는 그의 모습에 망설여졌다. 괜찮은 걸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지?

“뭐야? 보아하니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인데, 생각이 정리되면 말하던가.”

근처 벤치에 앉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목에 걸린 십자가를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네.”

“뭐가 미안한 건데? 네가 딱히 미안해할 게 있던가?”“자네의 상처를 건드린 것도, 자네를 울린 것도, 그리고 자네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모두 미안하네.”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도망쳤냐?”숙인 고개 사이로 꾹 다문 입술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 자네가 더 힘들어할까 봐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으로 피하려고 했네.”

“하, 평소엔 그렇게 용감하고 눈치 없는 놈이?”“상처받은 자네에게 내가 다가감으로써 더 큰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씨발. 진짜, 좆같게.”

그는 붉게 부어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작게 흔들리는 어깨와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가 울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어깨를, 무너져 내린 그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며 다독여주었다. 그래, 다시는 그를 울리지 않겠다고 맞닿은 체온에 맹세하였다.


 그 날 이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실의 분위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잔소리하는 조노비치양과 그걸 장난스럽게 넘어가는 렉스,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전보다 더 활기차진 것 같았다. 회사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렉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 같았으면 서로 피하고 모르는 척 넘어갔을 것들을 서로 감싸주게 되었다. 지난 일로 서로 오해를 하고 상처받고 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크루그먼의 배려로 일찍 퇴근하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고 쉬기 위해 소파 앉아있는데 렉스가 양주를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건넸다. 한 잔, 두 잔 말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라왔다. 눈앞이 흐릿해져 갈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도 취해있는 상태라 띄엄띄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상심에 빠져있던 그를 도와준 알비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생도 시절 휴일마다 빠져나가 만난 사람 또한 그 알비라는 남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병이 있었는데 그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숨기는 것이 없냐고 물어왔지만, 이미 그에게 다 말해주었기에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싱겁다는 듯 투정을 부리다 이내 제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저 피아노가 알비라는 사람의 것이었다는 것과 생도 시절 렉스가 급하게 외출했던 것이 그와 연결되어있다는 것 등 알비라는 사람이 드렉슬러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었다. 분하지만, 이미 멀리 떠난 이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신이 렉스 안에서 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지 말이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 피아노는 저렇게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았기에 새하얀 피아노는 장식용으로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선을 그어놓은 듯 그 선을 넘어가려고 하면 그는 자신을 거부하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완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계절은 흘러 푸르던 나뭇잎들이 화려한 치장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회사에서 긴 야근 주간이 끝난 기념으로 오랜만에 그와 같이 요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집에 있는 식재료로 미리 준비하기로 하고 자신은 필요한 물품을 장보기로 하였다. 자주 가는 가게에 들려 종이에 적혀있는 식재료들을 사고 나서는데 점원이 서비스라며 사탕이 들어있는 작은 병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안 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단골손님 서비스라는 그녀의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렉스가 기다리고 있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맛있는 냄새가 제 코를 자극하였다. 재료만 손질한다더니 결국 요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품에 안은 식재료들을 안고 부엌으로 향하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고 있던 식재료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육수를 내는 그의 뒤로 가 꼭 끌어안았다.

“왔냐?”

“아아, 무슨 요리를 하려고 육수를 내고 있는 건가?”

“네가 파에야 먹고 싶다며, 싫으면 하지 말까?”

“싫을 리가 있나.”

“그럼 육수 좀 보고 있어. 나는 네가 사온 재료 좀 다듬으련다.”

제 품에서 벗어나 식재료가 담긴 봉투 쪽으로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육수가 잘 우러났는지 확인을 하고 야채를 볶기 위해 팬에 기름을 두르는데 렉스가 무언가를 들고 제 쪽으로 다가왔다.

“야, 이건 뭐냐?”“아아, 그거. 가게 점원이 단골 선물이라며 주더군. 사탕 같던데 자네 피곤할 때 먹으면 좋지 않을까?”

“흐음.. 한 번 먹어볼까?”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자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렉스는 사탕하나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입에 넣었다.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내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무진장 달다. 너 못 먹겠는데?”

“달지 않은 사탕이 어딨나?”

“이건 꼬맹이들이 즐겨 먹는 것보다 더 단데? 어, 이거 사탕 안에 시럽 같은 것도 들어있네?”

“그 정도인가? 그것보다 시럽이라니 신기하군.”

사탕 안에 시럽이 들어있다며 신기하다고 하나 더 꺼내먹는 렉스를 보다 하나 먹어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으나, 꼬마 아가씨들이 즐겨 먹던 사탕의 단맛을 떠올리니 맛보려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맛있게 먹는 렉스를 보니 굳이 먹을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육수도 다 우러났고 야채를 볶는 과정도 끝났기 때문에 가스 불을 끄고 빈 그릇에 옮기는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큰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놀라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니 렉스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머리가 굳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풀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잡아 전화기를 잡았다. 주치의의 번호를 떠올리며 번호를 입력하였다. 제발... 빨리 전화를 받길.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는 주치의에게 렉스의 상태를 설명하니 그는 최대한 빨리 갈 테니 도착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렉스를 똑바로 눕히고서 주치의가 말한 대로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괜찮을 거라고 주치의가 와서 그를 살려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치의는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놓아주라고, 그는 이미 떠났다고. 외면하고 싶었다. 감긴 두 눈이 장난이었다는 듯 자신이 좋아하던 푸른빛을 다시 한 번 빛내며 자신을 담길 바랐다. 차갑게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그를 나는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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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거리, 온 마을에 신나는 캐럴이 이른 아침부터 울려 퍼졌다. 연말에 가까워지자 밀려오는 서류들로 인해 바로 어제까지 이 주 동안 야근을 했던지라 자신의 수면을 방해하는 소음이 반가울 리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잠을 취하기 위해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려 봤으나 이미 잠이 다 깬 뒤였다. 잠이 깬 김에 나가 간단한 아침을 먹을까? 고민했으나 제 몸을 부드럽게 감싸오는 이불의 촉감에 벗어나기가 싫어졌다. 배는 고픈데 이불 밖으로는 나가기 싫고 어찌하면 좋을까 뒹굴 거리며 고민하길 십 여분이 지났을 무렵 끼익-거리며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죄지은 사람처럼 꼼지락거리던 몸이 굳어 뻣뻣해진 상태로 잠든 척 해보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통하지 않았다.

"Merry Christmas! 렉스. 푹 잤는가?"

"아아. 너도 잘 잤냐?"

 깨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이불을 걷어내고 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는 녀석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손을 내밀자 알베르토가 따뜻한 커피와 토스트가 담긴 쟁반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무안해진 손을 뒤로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알베르토를 쳐다보니 싱긋 웃으며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어디까지 하나 가만히 보고 있자니 버터가 아닌 딸기 잼을 토스트 위에 듬뿍 얹어 바르기 시작했다. 알베르토가 단것을 즐겨 먹었던가? 자신도 약간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듬뿍 얹어 달게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더욱 이상해 보였다.

'사실은 꿈속이었다던가 그런 건가.'

 딸기잼을 바른 반대 부분에는 버터를 바르고 있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보며 현재 자신이 있는 공간이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고 말았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보다 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머그잔에 손을 뻗는데 토스트 괴롭히기가 끝났는지 이제는 제 커피마저 빼앗은 알베르토의 행동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야... 알. 이게 뭐하는 짓이냐?"

"자네의 아침을 챙기고 있지."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럴 리가."

 씨익 웃어 보인 알베르토가 잼과 버터로 범벅된 토스트를 반으로 접어 제 입에 넣었다. 순간이지만 제 입안을 유린하는 지나치게 단맛과 느끼함에 재빨리 접시에 뱉어버리고 말았다. 버터까지는 괜찮았다. 다만, 평소에 즐겨 먹던 잼이 아닌 시판용 잼인지 혀가 마비될 정도의 단맛을 가진 딸기잼이 문제였다. 입안 가득 채운 단맛을 빨리 없애버리고 싶었기에 알베르토에게 커피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제 말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제 커피를 홀짝이는 그의 모습이 얄미워 보였다.

"..야, 알... 너 이게 뭐하는 짓이냐?"

"자네의 아침을 챙기고 있다네."

"괴롭힘이 아니고?"

"괴롭힘이 아니라 내 애정이니 걱정 말게."

 그에게 잘못 한 것이 있었던 걸까? 최근 서류를 처리하느라 서로 바빠, 그에게 잘못했던 것은 없었을 텐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요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되짚는데 제 귓가에 들려오는 캐럴에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성탄절 약속... 오늘..이었...지?"

"흐음"

 빙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인지 괜한 토스트를 커피에 넣어 죽을 만들며 제 시선을 피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졌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을 왜 까먹고 만 것일까? 분명 오전에 성당에 들렀다가 데이트를 하기로 했었...지... 굳어지는 몸을 가까스로 돌려 시계를 보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출한다고 들떠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무릎 위에 놓여있던 쟁반을 옆으로 치우고 침대에서 벗어나 옷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여기에..."

 바쁘다고 그냥 집어 던져 놓았더니 물건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것저것 얽혀있는 물건들 사이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되어있는 상자를 꺼내 뚱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알베르토 방향으로 던졌다.

"야!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받아라."

"어...??"

 얼떨떨한 얼굴로 선물을 받아 포장을 푸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약속을 잊었던 자신의 잘못이긴 했지만 공들였던 만큼 제대로 주고 싶었는데... 뭐 이래나 저래나 전해줬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알베르토의 반응을 기다렸다. 야근하는 도중 틈틈이 만드는 바람에 좀 더 세밀하게 세공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그래도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게 만들어져 마음에 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밖에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그의 모습이 답답해 만들게 된 것인데, 마음에 들까 걱정이 되었다.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벽에 기대 그의 반응만을 기다렸다. 이리저리 만져보고 얼굴에 검은색 반가면을 쓰고 거울을 보더니 자신에게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기는데 언제 다가온 건지 자신을 꼬옥 안아 품 안에 가두었다.

"야...알? ㄱ...괜찮냐?"

"날 위해 직접 만들어 준 건가?"

"어...엉... 딱히 누구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내가 만드는 게 나으니까?"

"고맙네, 렉스."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인지 언제 삐졌냐는 듯, 자신을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는 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야근을 하면서 널 위해 틈틈이 만든 거니까, 영광으로 알라고! 크으, 역시 난 천재야."

"야근이라면 피곤했을 텐데..."

"멋진 얼굴 나만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답답하니까, 밖에서 투구 대신 쓰고 다녀라."

"아... 곤란하네, 렉스"

"ㅇ... 엉?"

 갑자기 안아들어 침대 쪽으로 향하는 그의 행동에 놀라 그를 밀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ㅇ...야...알?? 이건 아니지. 낮인데?"

"예쁜 말로 날 유혹한 건 자네 아닌가?"

"우리 나가기로 했잖아? 레스토랑 예약도 해놨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오랜만에 운동이나 하는 게 어떨까, 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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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샹바레] tulipani viola (데바 꽃말합작)

2015. 11. 1. 02:56 | Posted by 아뮤엘

내 곁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다. 능력자가 배척되는 사회에서 그 많고 많은 능력 중 벌레를 다루는 능력을 갖춘 나와 너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버려졌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살기 위해 다른 이의 물건을 훔쳐야 했고, 타인의 눈을 피해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가혹한 현실에 절망했을 무렵 아이를 만났다. 상처를 담은 보랏빛 눈동자를 통해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거부하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제 보금자리로 데려가 아이를 보살폈다. 빛을 잃은 눈빛은 점점 생기를 찾아갔고 아이는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 아이가 자신에게 기대듯 자신은 아이에게 기댔으며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결심했다는 듯 자신에게 말할 것이 있다며 아무도 없는 곳으로 자신을 데려갔다. 보금자리로도 괜찮았을 텐데, 아이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숲 속이었다. 아이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손에서 나비와 잠자리를 불러내었다. 아이의 손에서 피어나는 곤충들을 보며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이는 불안한지 곤충을 부르는 것을 그만두고 제 옷을 조심스레 잡았다. 아이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이의 용기에 보답하듯 자신도 반딧불을 불렀다. 제 손짓을 따라 움직이는 반딧불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이와 자신은 이런 부분까지 닮아있었다. 벌레를 다루는 능력. 자신은 반딧불만을 다루고 아이 벌레라는 종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졌지만, 그래도 이런 부분도 닮아있다는 점이 신기하고 더더욱 아이가 소중해졌다. 마치 아이가 자신의 반신과도 같았다.


서로의 능력을 알게 된 날 이후, 우리의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인 반딧불을 다루는 힘은 다룬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있다는 것만이 장점인 이 능력은 자신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체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머리가 좋다는 것만이 장점인 자신과 달리 아이는 능력을 쓰지 않아도 체력과 싸우는 것이 뛰어났다. 아이를 지켜주던 자신은 어느새 아이에게 지켜지고 있었다. 아이는 싸우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 언제나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나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면 아이는 주로 나비를 불러 자신에게 보여주었다. 자신과 닮아 새하얗게 빛나서 좋다고 활짝 웃어 보였다.


아이와 같이 지낸 지 2년이 지나갈 무렵, 한 남자가 자신들을 찾아왔다. 남자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거리에서의 삶에 지쳐있던 자신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손길과도 같았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아니었는지 남자를 경계하였다. 남자는 아이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는지 아이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남자의 손길을 쳐내고 자신을 뒤로 숨겼다. 남자는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자신이 키워주겠다고, 소중한 사람을 지킬 힘을 주겠다고. 아이는 고민하더니 이내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아이와 자신은 카모라라는 조직에 거두어지게 되었다. 조직에 거두어지고 나서의 생활은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머리가 좋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사람을 붙여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었고,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었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과 반대로 아이는 남자와의 약속대로 무술을 배우게 되었다. 주로 체술을 배웠지만, 몇몇 무기를 다루기도 하였다.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을 익혀나갔다.


조직에 들어오고 나서 아이의 몸에 상처가 끊이질 않았다.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자신의 목표를 의사라는 직업으로 정했다. 다친 아이를 치료해주고 싶었으니까. 나는 의료 쪽으로 진로를 잡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조직에서는 훌륭한 인재가 생겼다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아이는 현장에 나가 전투 요원으로서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게 아이가 원한 것이었기에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하루라도 빨리 의사가 되어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으니까. 그런 자신의 마음이 하늘에 전해진 것일까? 어느 가을밤이었다. 자신의 부탁으로 마을에 나갔던 아이가 크게 다쳐 돌아왔다. 배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이가 부상을 입은 게 한두 번이던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쉽게 냉정해질 수 없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지혈을 했지만, 자신이 치료할만한 수준의 부상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죽을 네가 아니잖아? 제발..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심정으로 차가워져 가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제발.. 아이를 살려주세요. 그 순간 주변이 순간 밝아졌다. 반딧불...? 반딧불들은 아이의 몸에 몰려들었다. 아이의 몸에서 떨어져!! 반딧불들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반딧불들은 자신의 손길을 무시하고 아이의 몸에 더 밀착하였다. 자신이 좀 더 유능했더라면, 의료에 대한 지식이 더 풍부했더라면... 눈앞이 뿌옇게 변하였다. 제 볼을 타고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더 이상 아이에게 용건이 없는지 하나둘 아이의 몸에서 떨어져 흩어져가는 반딧불이 원망스러웠다. 아이의 상처를 헤집어 놓았겠지, 애초에 반딧불이 사람의 상처에 달라붙다니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남은 반딧불을 아이의 몸에서 치워내고 상처 부위의 지혈을 위해 거즈를 집어 들었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 상처 부위에 식염수를 부어 굳은 피를 닦아내었다. 새하얗던 거즈가 붉게 물들고 붉게 물들었던 몸이 깨끗해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부상이 심각해 수술해야 했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마치 다쳤던 적은 없었다는 듯이 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꿈인가 싶어서 제 볼을 꼬집자 통증이 느껴졌다. 꿈은 아니구나... 그 순간 누군가 제 몸을 끌어안았다.

“여긴.... 분명 상처가”

“리키, 분명 물건만 받는 즉시 돌아오기로 약속한 것 같은데?”

제가 부탁한 물건을 제 몸보다 중요하다는 듯 품 안에 안고 들어온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는지 아이는 알고 있을까? 제 마음을 아는 건지 아이는 상처가 있던 부분을 쓰윽 보더니 자신에게 다시 기대었다. 상처는 없어졌지만, 피를 많이 흘렸다. 그건 자신도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미안.. 놈들이 매복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물건은 괜찮은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네 몸이나 걱정하지그래?”

“그건 그렇고 상처는...”

아이가 궁금해하는 것이 뭔지 알겠지만, 자신도 확답을 주긴 힘들었다. 자신의 능력은 반딧불을 조종하는 것 외에도 치유하는 능력도 있었나? 제 품에서 잠든 아이를 토닥거리며 주변 능력자 동료들을 떠올렸다. 치유계 능력자들은 많았지만, 자신과 같이 다른 매개체를 이용하는 능력자는 없었다. 더더욱 살아있는 생명체를 매개로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최초일 것이다. 능력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아이를 안아 침대 위에 눕혀놓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자리를 비우려 했으나 자신의 옷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깼나 싶어 뒤를 돌아보자 아이는 잠들어있는 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잡은 건가? 아이가 옷을 놓아줄 것 같지는 않고 어쩔 수 없이 실험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잠이 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직에 들어오고 나서 서로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라 단둘이서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제 옷을 잡은 아이의 손길이 자신에게 하는 투정 같았다. 곁에 있어달라는. 제 옷을 잡은 아이의 손이 불편하지 않게 가디건을 벗었다. 아이의 팔을 뻗은 상태로 만들고 그 팔을 베개 삼아 베고 누웠다. 마주 보이는 아이의 얼굴은 살짝 찡그려졌다가 이내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평소 주변 또래 친구들에게 애 취급 받는 건 싫다며 항상 미간에 힘을 주고 다녔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앳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아니 자신밖에 없어야 했지만.


아이의 숨소리에 마음이 놓였는지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는지 창밖으로 새벽하늘이 보였다. 잠든 아이의 이마에 키스하고 거실로 나왔다. 피로 범벅된 바닥과 주변을 정리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피향으로 가득한 실내를 창을 열어 환기시켰다. 깔끔해진 집안을 뒤로하고 장식장에서 브랜디를 꺼내었다. 잔에 따라 한잔 마시고 나서야 아이가 받아온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포장지가 붉게 물들었지만, 물건은 괜찮은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포장지에서 꺼낸 물건은 보라색 튤립 조화 한 다발과 고급스러운 은시계였다. 아이에게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자신이 직접 찾아오려고 했지만, 급작스레 잡힌 일정에 아이에게 가져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는데... 아이를 다치게 만들고 자신의 능력의 새로운 면을 알게 해준 이 물건들을 보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시계는 따로 준비한 상자에 넣어 다시 포장하고 튤립은 화병에 담았다. 보라색 튤립. 너와 닮은 이 꽃을 내가 매일 집 안에 장식해놓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을까? 사랑의 고백, 영원한 애정이라는 꽃말을 가진 튤립, 그리고 네 눈동자를 닮은 보라색. 보라색 튤립 자체는 영원하지 않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꽃말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네가 하루라도 빨리 너를 닮은 이 보라색 튤립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만을 기다릴 뿐. 사랑하는 리키, 오늘도 난 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

[로라드렉] Happy Halloween!! 합작

2015. 10. 31. 23:25 | Posted by 아뮤엘

“Trick or Treat!”

마녀로 분장한 두 소녀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아, 벌써 할로윈인가?”

“그러니까 빨리 간식을 주는 건 어때요?”

“에엣.. 저는 딱히 안 주셔도....”

“으음.. 기다려봐라”

분명 업무 중 당이 떨어져 집중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다 놓은 것이 있을 터인데... 각종 물건으로 무질서하게 채워져 있는 서랍을 뒤적거리다, 오늘 아침 출근하기 위해 준비하는데 가져가는 게 좋을 것이라며 챙겨준 물건이 생각났다.

“분명 여기에... 아, 찾았다”

책상 위 서류들을 한쪽으로 치우자 작은 봉투가 보였다. 봉투 안에는 아이들을 겨냥한 듯 귀엽게 포장된 쿠키가 들어있었다. 두 봉지를 꺼내 아이들의 손에 들린 바구니에 넣자 그제야 만족했는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마저 업무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아이들이 제 옷깃을 잡아당겼다. 무슨 용건이 더 남은 것일까? 몸을 숙여 시선에 맞추자 아이들은 고맙다고 제 볼에 입을 맞추며 다음 타켓을 향해 달려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 있었던 일은 그에게 비밀로 해야지, 그가 알면 분명 질투할 게 뻔하였다. 할로윈이라..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 볼까?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고 윌라드에게 오늘은 일찍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하니 알았다며 들어가 쉬라는 인사를 받고 회사에서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할로윈인데 간단하게라도 파티 음식을 준비할까 싶어 마트에 들렸다. 마트는 할로윈 관련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관련 물품들이 할인하고 있었다. 딱히 살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식재료를 골라 계산대로 향하는데 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라... 녀석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지만...

“뭐, 할로윈이니까 분위기로 하나쯤은 괜찮겠지”


계산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평소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일부러 일찍 퇴근했건만,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현관문의 잠금을 풀고 들어가자 어두운 집안이 자신을 맞이하였다. 신을 벗고 곧장 부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온 식재료를 냉장고 안에 넣었다. 요리하기 전 오늘 옷이 정장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제 몸을 끌어안았다.

“집에 있었냐?”

“아아, 뭘 그리 사왔는지 물어봐도 될까?”

“흐음...”

“지금 이 행동에 대해서 나는 뭐라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 렉스”

질척하게 붙어 애정행각을 하는 녀석을 팔꿈치로 살짝 밀어내고 주머니에 넣어둔 은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살짝 몸을 틀어 십자가로 녀석의 입을 꾸욱 눌렀다. 사자(死者)는 은에 약하다고 하던데 역시 미신이었나? 십자가를 쥔 제 손을 마주 잡아오는 알베르토의 얼굴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알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가끔 잊고 지내는 것 같았다.

“네가 죽은지도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넌...”

창백한 피부와 차가워진 너의 품 안에서 매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까?

“후회하고 있나, 렉스?”

차가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내가 후회할 리 없잖아. 죽은 그를, 그의 품을 잊지 못해 불렀다. 바로 2년 전 오늘, 네가 죽은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다. 할로윈은 죽은 영혼이 돌아오는 날, 그래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너를 돌려달라고, 다시 한 번 네 품에 안길 수 있게 해달라고 텅 빈 네 방, 네 체취가 남아있는 옷들을 끌어안으며 울며 빌었다. 그러다 지쳐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으로 누군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는 물었다. 사랑하는 이가 돌아오길 원하냐고 나는 그 찰나의 순간 그에게 답하였다. 그를 돌려달라고.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갑지만 익숙한 손길.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겨우 뜨자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너의 얼굴이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해왔다.

“보고 싶었네, 렉스. 매일 울고 제 몸을 돌보지 않으니, 걱정되어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잖나.”

“먼저 간 네놈이 잘못이지”

참으려고 했지만, 뿌옇게 흐려지는 눈앞에 이불을 끌어올려 제 모습을 숨겼다. 이불 위로 토닥이는 한없이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멎지 않았다. 죽었던 네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 날. 오늘은 너와 다시 이어진 소중한 날이다.

[로라드렉] empaparse

2015. 10. 11. 03:32 | Posted by 아뮤엘

철이 들었을 무렵,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가문에 대해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다 부질없다고 느껴졌으니까. 부모님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자신을 한계까지 내몰았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고 나면 잘했다, 그래야 내 아들이지.라고 말하며 다음 목표를 내밀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따뜻했으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주었으니까. 주변에서는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다. 어린 나이에 창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난데, 지식을 습득하는 것 또한 뛰어나다며 자신을 칭찬하기 바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하나같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동경, 두려움, 악의, 견제 등이 섞인 시선은 자신을 지치게 하였지만, 부모님이 지어주는 그 미소에 목말라 있던 나는 더더욱 노력하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날 바라봐 주실 거야. 날 사랑해주실 거야. 그렇게 믿고 있었다.

세 살이 되던 해였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들로부터 더는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더 좋은 선생님들을 데리고 올 테니,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끔 주어지는 휴식시간이 좋았다. 아버지가 정한 일정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나는 재빨리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책꽂이에서 별에 대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찾아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지고 왔다. 별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며 배우는 걸 금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방에 있는 책이라곤 별에 관련된 동화 한 권뿐이었다. 아버지의 눈에 닿지 않게 책 사이에 잘 숨겨놓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들키지 않았다. 만약 들켰다면 바로 압수당하였을 것이다. 가져온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보니 어떻게 숨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분명 책장에 꽂으면 들킬 것이 분명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였다. 침대 밑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길게 늘어진 이불을 살짝 걷어내고 침대 밑에 가져온 책들을 넣었다. 걷어내었던 이불을 내려 잘 가려졌는지 확인하고 책장에서 창에 대한 책을 꺼내 들어 소파에 앉았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가져온 책들을 읽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황이라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기로 하였다. 창에 관련된 책도 좋았으니까. 한 장, 두 장 넘기기 시작한 책은 벌써 끝을 달리고 있었다. 창의 쓰임새와 사용방법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어 좋았지만,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창을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면...”
펜을
쥐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새로운 선생님을 구해왔다며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되니 일찍 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잠을 자는 시늉을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침대에서 나왔다. 밑에 숨겨 놓았던 책 한 권을 꺼내 흐릿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 별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위대하고 흥미로운 세계였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혼자 공부하기 시작한 별의 세계는 자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가 새로 데려온 선생님이 앞에서 뭐라고 하던 자신의 머릿속에는 별로 가득 차 있었다. 별들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저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은 더해갔다. 별에 빠지면 빠질수록 다른 일들에 소홀히 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보고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꾸짖었다. 생각이 있냐며,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말이 주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홀린 듯 나는 아버지께 처음으로 내 의견을 말하였다. 천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별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말한 내 의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아버지는 그런 쓰레기 같은 학문으로 무얼 하려고 하냐고,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 따위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기사학교에 들어가 기사가 될 준비나 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듣고 방으로 돌아왔다. 뭔가 부자연 스러운 방...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 밑으로 들어가니 숨겨 놓았던 책들이 다 사라졌다. 책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하기 위해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집무실의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숨을 죽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대화의 내용은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가문의 흠이 되기 전에 빨리 학교에 보내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학교에 보내느니 자신들이 직접 감시를 하며 가르치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대답하고 있었다. 아아.. 내 편은.. 없었던 거구나. 그저 가문의 명예를 중시해 자신도 가문의 명예를 위한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더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짐을 쌌다. 자신은 그 찰나의 미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자신은 그저 그들의 장식품이었다는 사실이,그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면하기에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 그저 이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집사를 통해 기사학교에 들어가겠다고 아버지께 말을 전하였다. 아버지는 가서 정신 차리고, 가문에 흠이 가지 않도록 타인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래, 저택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어린 자식이 저택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나는데도 자식에 대한 걱정보다는 가문을 더 신경 쓰는 부모님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그 작은 미련마저 사라졌다.

기사학교에 들어가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가문을 보고 달라붙는 이들을 보니 짜증이나 작게 성의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라 수업시간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나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학교의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직 가르치지 않은 내용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 했지만 역으로 자신이 틀린 부분을 지적했더니 그 뒤로 자신을 건드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학교 내에서 자신의 악명은 쌓여만 갔고, 가문에서도 편지가 날라왔지만, 편지는 좋은 땔감이 되었다. 거기다 2인 1실이 기본인 기숙사에서도 다들 자신과 같이 방을 쓰는 것을 꺼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혼자서 쓰게 된 것도 좋았다. 시간은 흘러 15살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죽이 맞는 선생을 만나 자신이 몰랐던 영역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수확이었다. 직접 창을 만들어보기도 하였으며 밤하늘이 맑은 날이면 망원경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별들을 관측하기도 하였다. 저택에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즐기며 나만의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주변에서는 자신을 괴짜,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맞춰 사는 것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렸으며, 타인의 시선 따위는 이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 내가 원했던 것들이었을 텐데 창밖을 보면 삼삼오오 모여 노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 한구석을 타고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에 창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눈을 감고 그 감정을 잊고자 잠을 청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최소로 하며,자신이 가진 상처를 숨기고자 가슴 깊숙이 숨기고 숨겨 수많은 자물쇠로 꼭꼭 잠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하였다. 숨기는 것이 익숙해져 이제는 덤덤해졌을 무렵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2살 어린 올곧은 눈을 가진 알베르토 로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너. 소설 속에 나오는 기사처럼 정의를 실천하는 기사가 되고 싶다던 너는, 나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다들 기피하던 나와 같이 방을 쓰겠다고 나서는 너의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쳤었다.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보다 배는 심하게 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트집을 잡거나, 너의 물건을 어질러 놓는 등의 행위들. 너는 그때마다 나를 찾아와 또박또박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로 해달라며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로운 창을 연구하고 있자면 어느 순간 옆에 앉아 의견을 덧붙이기는 너의 모습에 놀라 저리 꺼지라며 연구노트를 숨겼지만, 너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어느 순간부터 연구할 때 네가 옆에서 조언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가와 나의 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꺼지라고,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외면하여도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는 너의 모습에 나는 조금씩 너에게 물들어갔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간단하게 풀고 옆에서 잠든 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려 보인다고 놀렸더니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었는지 조금씩 기르기 시작한 수염. 살짝 흐트러진 고동색 머리카락과 감긴 두 눈. 매일 자신에게 마법이라도 걸듯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입. 조금씩 나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던 너는 결국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자물쇠로 꽁꽁 잠가 숨겨두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풀어나갔다. 소중하다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깨달았을 때는 하나의 자물쇠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곧 너의 손에 열렸지만.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니

굳게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 눈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사랑하네, 렉스”
“..아아
, 나도 사랑한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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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벨져] guilt - 下

2015. 10. 6. 03:21 | Posted by 아뮤엘

얼마나 달렸을까? 기차를 타고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실 자신이 가려는 곳은 이 역에서도 차를 타고 한~두 시간은 더 가야 있는 장소였다. 짐을 들고 역 앞 광장에서 마차를 탔다. 멍하니 창문을 열고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항상 긴장을 놓을 새 없이 싸우고 죽이는 생활의 연속이었기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유로운 일상이 오히려 어색했다. 푸르름을 뽐내는 나무들 사이로 새파란 바다가 보였다.

아아, 벌써 도착인가? 마차가 멈추고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마부에게 고맙다고 팁까지 쥐여주고 일단 묵을 장소부터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행객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장소는 아니었는지, 마을에 여관이 있었다. 여관에 들어가 방을 얻어 짐을 내려놓은 뒤, 바닷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의 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파도치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도시를 떠나 바다로 왔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평소 입던 정장 대신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반소매에 반바지, 거기다 바닷가에 나간다고 하니 여관 주인이 신으라고 건네준 슬리퍼까지. 완전 피서객의 모습이었다. 모래사장을 걸을 때마다 신발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의 촉감이 좋아 결국 신발을 벗어 손에 들었다. 찬 바닷바람과 달리 따뜻한 모래. 마음이 차분해졌다. 길게 늘어진 해변가를 따라 걷다 보니 저 멀리 절벽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꽤 많이 걸어온 것 같았다. 해가 저물기까지 그리 머지않아 슬슬 되돌아가야 하지만, 절벽까지 멀어 보이지 않아 절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곳에서의 짧은 휴식이 끝나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천천히 생각을 되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을 거리라는 걸 잘 알기에 더더욱 지금 이 시간이 소중했다.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하아...”
냄샌가... 또 분쟁이... 지긋지긋하군.
“또 어느 조직ㅇ....”
자연스럽게
뒤돌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감았던 눈을 뜨니 매우 평화로운 석양이 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자신이 휴가를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피 냄새는 어디서…? 희미한 냄새를 따라간 곳은 절벽 아래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위가 가득한 곳이었다. 파도와 바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각각의 모양을 지닌 바위 사이로 새하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꽤 검은색의 고급 진 재질의 옷, 그리고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몸을 뒤집었다. 새하얗게 질려서 그렇지 꽤나 미형이었기에 여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을 손에서 빼내었다. 이도류인가? 검을 남자의 허리에 달린 검집에 넣고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맞닿은 피부로 느껴지는 상대방의 체온은 상당히 내려간 상태였고 복부에 입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상태였다. 상처가 그리 깊은 편은 아니었으나, 상태를 보아하니 상처를 입고 방치된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았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쳐갔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서둘러야겠군
입고 있던 셔츠를 찢어 상처 부위를 감아 조심스레 안아 들고 마을을 향해 달렸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마을에 있는 의원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를 치료한 의사는 출혈량이 많고, 체온이 낮아진 상태라 쇼크 현상이 온 것이라고 말했다. 수혈도 잘되었고, 상처도 잘 봉합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에게 감사하다고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평소라면 죽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왜일까? 조금씩 체온이 돌아오기 시작했는지 파랗게 질려있던 입술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새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 여인네들이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바르는 붉은 립스틱이 그려내는 것보다 더 매혹적이었다. 아름답다. 이 감은 눈 속에는 무엇을 담고 있을까? 남자가 그려내는 음은 어떠할까?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왜 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자신의 손길을 느낀 것인지 작게 뒤척이는 남자의 행동에 살짝 손을 떼어내었다.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 이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모자라 검을 그냥 검집에 넣었지만, 그리 내버려두면 검이 상할 게 뻔하였다. 남자가 일어날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의사에게 부탁하여 천을 얻어왔다. 얼핏 봤었지만, 전투한 모양인지 검에는 바닷물에 어느 정도 닦이긴 했지만, 피가 묻어 있었다. 두 검을 닦아내니, 꽤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검을 검집에 넣어 탁자 위에 다시 올려놓으려는데 빛에 반사된 검집에 새겨진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Belzer Holden

“벨..져..인가?”

“...ㅇ.....”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인지 작게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줄곧 감겨있던 눈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아이스 블루색의 눈동자. 아아, 빨라지는 심박수를 느끼며 언젠가 피에르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것이 저리 호들갑 떨 정도로 좋은 건가?’

‘리키, 너도 언젠가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알게 되겠지. 누군가를 바라만 봐도 설레고, 그 사람이 계속 생각나는 감정을’

아아,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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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contrattacco

2015. 10. 4. 00:17 | Posted by 아뮤엘

보기 좋게 잘 정돈된 결 좋은 고동색 머리카락. 푸른 하늘을 닮은 듯 맑고 깨끗한 푸른 눈. 굳게 닫힌 붉은 입술. 지나치게 절제된 삶을 살아가는 너.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른 채, 모범적인 기사의 모습을 삶을 살아가는 너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따금 장난을 치게 된다. 성인 잡지를 실수인 척 너의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거나, 오늘처럼 맛없는 기숙사 내 식당의 밥 대신 숙소에서 밥을 만들어 먹을 때, 마주 앉은 너의 중심을 발로 슬쩍 누른다던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는 너의 모습에 다리가 저려서 그랬는데, 혹시 내가 실수했냐고 물어보면 너는 입술을 꾸욱 다문 채 괜찮다며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식사를 마저 하였다. 귀까지 붉게 물든 걸 보아 하니, 식사 후 먼저 샤워를 하겠다며 넌 욕실로 들어가겠지. 천천히 토스트를 입에 넣었다. 바삭거리는 식감이 좋았지만, 딱딱한 식감에 목이 아팠. 어쩔 수 없나? 커피를 그리 즐기지 않았지만, 따로 차를 타오려니 막 일어난 탓에 나른해 움직이기가 싫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 마시진 않았을 것이 뻔했다. 팔을 뻗어 로라스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로라스는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뻗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 제 몫의 토스트를 마저 먹더니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렇지. 제 예상대로 행동 하 그를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왔다. 그와 함께 지낸 지도 벌써 5년. 고된 임무로 인해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이들을 보면 그와 알고 지낸 지도 오래 되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자신의 성격을 알고도 같이 지내는 걸 보면 그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하는 소리. 남은 토스트를 입에 털어 넣고 식기를 싱크대에 놓은 뒤 욕실 쪽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문에 귀를 대고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였다. 밖을 의식하듯 작게 억눌린 신음이 끊겨 들리다 이내 작게 숨을 내쉬는 소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럼 그렇지. 문에서 귀를 떼고 조심스레 문에 기대었다. 이 짓도 벌써 몇 번짼지. 다른 사람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금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너의 모습을 보자면 속이 뒤틀렸다. 그 가면을 벗기고 싶었다. 네놈도 사람인데, 자신은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욕망을 꾹꾹 누르는 네 모습이 싫었으니까. 내 입맛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과 비교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너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알. 기약 없는 시험을 작한 지도 벌써 3년. 솔직히 2년째 되던 날, 이제 그만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만두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오기로 하는 것인데....

“.....그만둘까
반응이야 재밌긴 하지만, 슬슬 질리기도 하고.
시험을 잘 치른 학생에게 주는 상은 없는 건가?”
멍하니 고민을 하고 있는데 더운 열기가 제 몸을 감싸왔다. 이크 늦었다라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 봤지만, 뒤에서 끌어안아 도망도 치지 못한 채 그대로 잡혀버렸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흠칫 놀랐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ㅇ..알고..있었냐?”
으음.. 그렇게 대놓고 하는데 못 알아차리면 그게 바보가 아닐까 싶네만?”
ㅇ...언제부ㅌ...”
“뒷이야기는
나중에. 나는 상이 받고 싶거든.
생긋 웃는 얼굴로 자신을 안아 들어 침대로 향하는 로라스의 행동에 저항을 해봤지만, 귀를 깨물며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압도당해 버렸다.
야..잠시만 알..야???”
“쉿.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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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너와 이어지다.

2015. 9. 3. 23:27 | Posted by 아뮤엘

지쳐있던 나에게 너라는 존재는 구원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알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나를 판단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내 배경을 보고 접근하였다.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던 부모님마저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나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다가와 준 네가 얼마나 고맙던지. 너는 모르겠지. 내 잘못에 대해 꾸짖으면서도 잘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주는 너의 모습에 내가 바라던 사람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너에게 집착을 하게 되었다. 네가 내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피했다. 보기 싫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널 가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 15살의 나는 20살의 성인이 되었다. 가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제명하였다. 머물 곳이 없어져 안 되었다며 비웃음에 가득 찬 위로를 날리는 이들을 무시하고 제 방으로 들어왔다. 가문? 가문은 자신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기사단에서 생활했고 그가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으니까. 그저 그만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좋았으니까. 자신이 가문에서 제명되었다는 소문에 여기저기서 자신을 괴롭혔다. 밖으로 나가면 자신에게 몰려드는 인파에 지쳐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아, 연구 노트를 꺼내 아이디어를 정리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였다. 소문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밖으로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밥이야 연구를 할 때는 간단하게 먹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차와 빵, 과자 따위로 배를 채웠으니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밤하늘의 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새로 만든 발명품의 완성이 막바지에 이르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어느 미친놈이 방까지 찾아왔나 싶어 무시하려 했지만, 뒤이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렉스, 안에 있는가?"

"....알?"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여니 자신을 껴안는 알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자신을 꽉 껴안은 채 놓지 않는 녀석의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내가 임무를 수행하러 다녀온 사이 가문에서 제명되었다고 들었네. 괜찮나?"

"아? 뭐.. 딱히 가문에 대해 그리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건 그렇고 너야말로 임무는 잘 다녀왔냐?"

"아아.그리 위험한 임무는 아니었으니까"

소파에 앉는 녀석에게 차를 내어주고 맞은편에 앉는 데 불편한 듯, 한쪽 다리를 뻗는 알의 모습이 수상하여 실수인 척 발로 지그시 눌렀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알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새꺄 다쳤냐?"

"크음.. ㅋ..큰 부상은 아니니 걱정 말게"

"이번 임무는 안 위험하다며, 상처까지 입고. 거짓말 한 거냐?"

감추듯 다리를 살짝 빼는 녀석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몸을 일으켜 녀석의 다친 쪽의 다리를 잡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걷어 올린 바지 안에는 피가 배어 나왔는지 군데군데 붉게 물든 붕대가 보였다.

"야... 이거 뭔데?"

"...임무와는 관계없는 상처이니 걱정 말게"

"하아... 기다려봐. 보아하니 붕대만 감고 온 거 같은데 치료는 해야 할 거 아냐"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낸 뒤, 욕실에 들려 젖은 수건을 들고 앉았다. 조심스레 붕대를 풀자 어디에 쓸린 듯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바닥에 넘어져 쓸린 듯한.....

"...야.. 알"

"........"

"너 넘어졌냐?"

"......."

자신의 시선을 회피하는 알의 모습에 제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하의 알베르토가 바닥에 자빠져 상처를 입다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상처를 치료하자 알은 부끄러운지 크음하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회피하였다. 상처를 치료하고 붉게 물든 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

"......."

"누가 발 걸었냐?"

"그럴 리가! 오는 길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그랬던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신에게 숨기는 거지? 혹시 마음에 든 여인을 구하다 넘어진 건가? 최근 선물에 대해서 묻더니... 정말 마음에 든 여인이라도 생긴 건가?

"야.. 치료 다 끝났으니까 슬슬 나가봐라"

"...렉스, 화났나?"

"내가 왜?"

자신이 생각해도 싸늘한 말투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인이 생긴 알은 언젠간 자신을 떠날 게 분명했으니까. 자신은 그 모습을 지켜볼 만큼 착한 성격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어 참고 책상에 앉았다. 들어오지 않는 내용의 연구 자료를 끄적이고 있자니, 뒤에서 누군가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렉스"

"..왜..."

"렉스, 왜 화가 났는지 말해주지 않겠나?"

"화 안 났으니까, 빨리 가라"

"거짓말은 좋지 않네. 응?"

".........."

"하아... 좀 더 분위기를 잡고 주려고 했건만"

"....엉?"

제 등 뒤로 느껴지던 따뜻한 감촉이 사라지고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로라스는 작은 상자를 들고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내 상자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더니 제 왼손 약지에 끼웠다. 설마 하는 마음에 손을 들어 확인하니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가 제 존재를 뽐내듯 빛나고 있었다.

"..야...알 이거..."

"자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나?"

"엉? 오늘이..."

책상 위 달력을 들어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였다. 분명...

"9월...3일이라.. 아.. 내 생일?"

"...역시 몰랐던 건가"

"새꺄.. 생일 선물이라도 그렇지 이게 뭐냐?"

작게 한숨을 쉬는 알의 모습에 괜스레 부끄러워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생일에 반지라니. 단순하다고 해도 끼고 다니기에는 좀.. 그래도 준 녀석의 성의가 있으니 고맙다고 말하고 서랍에 넣기 위해 반지를 빼내려는데 따뜻한 손이 그것을 저지하였다.

"주자마자 빼는 게 어딨나. 그리고 내 말 아직 안 끝났네"

"아니 끼고 다니기에는 좀..."

"사랑하네, 드렉슬러. 내 감정을 허락해 주겠나?"

조심스럽게 제 손에 입을 맞추며 자신에게 제 사랑의 허락을 구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뭐..? 알베르토가 누굴 사랑해? 날?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정말, 그가 날 사랑한다고?

"야... 장난 아니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진심이네"

"...새꺄... 그런 건 눈치를 주고 말해야지.. 시발. 새꺄 너 비겁해"

붉게 물든 얼굴이 그에게 들킬까 봐 겁이나 책상 위에 있던 공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우스운 듯 작게 킥킥거리며 자신을 껴안았다.

"그럼 대답은 긍정으로 알아듣겠네. Mi 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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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제

2015. 8. 31. 23:43 | Posted by 아뮤엘

2015.09.01~


단편소설 100제

 

 

001. 벚꽃
002. 사람
003. 믿음
004. 바보
005. 비
006. 하늘
007. 말(言)
008. 무(無)
009. 눈물
010. 상냥함
011. 인사
012. 아픔
013. 출구
014. 눈(目)
015. 반복
016. 졸음
017. 잠
018. 소유
019. 손(手)
020. 구조
021. 세계
022. 길
023. 따스함
024. 꿈
025. 발걸음
026. 구름
027. 상처
028. 빗방울
029. 빛(光)
030. 잔상
031. 흑백
032. 별
033. 홀로그램
034. 겨울
035. 외로움
036. 풍경
037. 안개
038. 무지개
039. 그림자
040. 목소리
041. 장미
042. 사라지다
043. 칼
044. 여름
045. 바람
046. 희망
047. 환상
048. 붉음
049. 죄인
050. 노래
051. 살해
052. 문
053. 잃다
054. 표정
055. 감정
056. 흰색
057. 밤
058. 마음
059. 물방울
060. 온기
061. 작은 마을
062. 어둠
063. 기억
064. 결말
065. 생명
066. 존재
067. 나비
068. 한숨
069. 맹세
070. 붙잡다
071. 흉내
072. 용서
073. 인형
074. 외침
075. 안정
076. 진실
077. 거짓
078. 눈속임
079. 결정
080. 비난
081. 혼란
082. 틈
083. 난반사
084. 교차
085. 시간
086. 보고싶다
087. 분함
088. 거품
089. 과거
090. 죽음
091. 올곧다
092. 악
093. 미련
094. 암시
095. 불평
096. 닫히다
097. 인격
098. 폭주
099. 정지
100.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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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벨져] guilt - 上

2015. 8. 31. 02:00 | Posted by 아뮤엘

해변 립스틱 바레벨져

내게 주어진 환경들은 나를 지치게 하였다.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곳에서 살기 위해,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자신이 강해질수록 제 손에 묻는 피의 양도 늘어났다. 제 몸을 떠나지 않는 이 역겨운 냄새가 싫었다. 살기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타인을 죽이는 제 모습도 역겨웠다.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보스에게 가 처음으로 휴가를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 놀라웠는지 보스는 제 예상보다 넉넉한 기간의 휴가와 휴가비를 챙겨주었다.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보스는 계속 거절하는 것도 실례라며 제 손에 돈 봉투를 쥐여주고 집무실에서 쫓아 내었다. 어딜 갈까? 휴가를 받는 데 성공했지만, 막살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휴가 요청이 거절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딱히 생각하지 않은 탓이 컸다. 일단 집으로 가볼까. 여행을 떠나려면 짐도 챙겨야 했으니,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오는 길, 냉장고가 텅 비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간단하게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집 근처 마켓에 들렸다. 당장 내일 떠난다고 해도 오늘 저녁과 아침은 먹어야 했기에 빵과 햄, 약간의 과일을 샀다. 잠긴 문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최소한의 가구만 놓인 방이 눈에 들어왔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집에 있는 일이 드물어 집에 오더라도 잠만 자고 나가는 일이 많았다. 새삼 집 안의 풍경이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꾸밀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기에 괜찮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 물을 틀고 가만히 서서 흐르는 물을 맞고 서 있었다. 한참을 그리 서 있다 눈을 떴다. 투명한 물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제 몸을 적시고 있었다.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삼키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언제 그랬냐는 듯 투명한 물이 제 몸을 적시고 있었다. 어질 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욕실에서 나왔다. 뚝뚝 떨어지는 물을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일까? 눈을 뜨니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벌써 아침인가? 어기적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어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서 그런지 출출했다. 햄과 과일을 썰어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샤워까지 하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 되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어딜 갈까 고민하였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집에서 휴가 내내 쉴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딱 여기다 싶은 곳이 없었다. 아, 머리 아프다. 뭐라도 보면 괜찮은 생각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TV를 켰다. 새하얗게 분을 칠하고 립스틱으로 붉게 입술을 칠한 여인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이 나왔다. 아름답다고 환호하는 관중의 모습에 도대체 어디가 아름답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채널을 돌려도 나오는 것은 엇비슷했다. 싸구려 코미디, 여인들의 로망을 담은 드라마. 몇 번을 돌렸을까? 지친다. TV를 끌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돌려보고 꺼야 한다는 마음으로 돌린 채널에는 한적한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변이라 사람만 없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해변이 있던가? 계절이 계절인 만큼 사람이 많을 텐데. 고민하다 내가 선택한 곳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곳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사람들은 가지 않게 되니까.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는 해변으로 여행지를 정하고 짐을 챙겼다. 오래 머물 생각은 없기에 적은 수의 옷가지와 세면도구 등을 챙겨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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