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붉은 비가 내렸다. 나는 두 손을 모아 붉은 비를 받았다. 모은 손안에 고이는 액체를 조심스레 볼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하다. 비는 이내 멎어 들었고, 바닥에는 붉은 웅덩이만이 그 흔적을 나타내었다. 물줄기를 따라 걷다 보니 비린내가 더욱 짙어졌다.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감았던 눈을 뜨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성당 앞에 기대어 앉아있는 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네가 앉아있었다. 새하얀 눈꽃을 닮아 빛나던 너의 머리는 붉게 물들고, 푸르게 빛나던 너의 눈은 굳게 감긴 채 떠지지 않았다. 깊이 잠이 든 네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항상 따뜻하던 너의 품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길 바랐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너에게 둘러주고 그대로 안아 들었다.
한참을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려 최대한 그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
다. 크고 작은 건물이 가득한 회색의 숲에서 벗어나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에 있는 숲이었다. 차오르는 숨을 천천히 내쉬고 근처 나무에 기대었다. 아직 쉴 수는 없었다. 너무 무리한 탓일까. 제 다리는 고통을 호소하며 자꾸 힘이 풀려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풀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절벽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미친 사람처럼 수풀 사이를 헤쳐나갔다. 쏴아아-하는 폭포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며 약간 넓은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도착했다. 드디어.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심스레 품에 끌어안은 그를 내려놓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와 시간이 날 때, 자주 오던 이 절벽은 옆에는 폭포가 떨어지기 때문에 겨울보다는 여름에 더 자주 찾아왔었다. 떠오르는 추억을 뒤로하고 외투를 살짝 벗겨내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네가 좋아하던 곳이다. 다이무스”
피에 젖었던 머리는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빗물에 제 색을 되찾아갔다. 빗물이 다 씻겨내지 못해 약간의 붉은 기가 남아있는 은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억눌린 감정이 비집고 나오는 것을 애써 삼키며 구슬프게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타리우스가 부활했다. 라는 정보를 가져온 그의 둘째 동생 덕분에 ‘인형실 끊기 작전’ 이후 세 조직이 손을 잡게 되었다. 동맹이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 측 능력자들이 공격을 받는 사건이 터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타리우스쪽에서 전쟁을 선포한 것이었다. 전장은 서로의 눈치를 보듯 천천히 흘러갔다. 눈치싸움도 길어지면서 하나둘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동맹 측의 상태를 안 안타리우스는 바로 공격을 가해왔고, 동맹 측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다행히 더 큰 피해를 당하기 전에 처리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피로를 느끼는 자신들과 달리 개조인간들은 계속해서 치고 들어왔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 부상자는 늘어만 갔고, 동맹의 사기도 꺾일 대로 꺾인 상태에다가 서로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챙기려는 수뇌부들의 머리싸움에 제대로 된 작전이 내려오지도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능력자들끼리 모여 수뇌부들의 결정을 기다리느니, 일단 들어오는 적부터 잘라내 어느 정도 버티자는 의견이 수렴되어 4~5명이서 한 팀으로 나누어 각 구역을 맡는 것으로 이야기가 정리되었다. 팀에서의 역할이 겹치는 자신과 그는 다른 팀으로 배정되었다. 그와 떨어졌다는 아쉬움보다 마음 한구석에 감도는 불안감에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이미 정해진 팀을 쪼개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제 머릿속을 맴도는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였다. 제 생각을 꿰뚫었는지 어느새 다가온 그가 눈짓으로 옥상을 가리키고 저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자신에게 내일 있을 작전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표정이 굳었더군”
옥상에 도착하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뒤에서 그를 껴안자, 그가 자연스레 기대어 왔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살 내음이 불안했던 제 마음을 안심시켰다. 그는 이렇게 제 곁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제 곁에서... 따뜻한 손길이 제 손위에 놓였다.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 갔었나 보다. 그런 자신을 달래듯 제 품에서 벗어나 손을 잡아주는 그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부드럽게 제 리드에 따라 혀를 섞었다. 짧은 키스가 끝나고 그를 마주 안고 서로 작은 약속을 하였다. 살아 돌아오자고, 다쳐도 괜찮으니까, 살아서 돌아오자고. 그는 작게 미소를 띠며 알겠다고 자신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살아 돌아오겠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약속을 그는 지키지 못한 채 제 곁을 떠났다.
지키겠다고 약속했잖아. 제 품에 안겨 잠이 든 그가 괜스레 원망스러워 볼을 꾸욱 눌러봤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은 제가 더 잘 알았다. 임무 내내 저한테 경고하듯 울리는 불안감을 외면하며 제 감이 들어맞지 않길 바랐다. 제가 맡은 구역의 임무를 끝내고 지원 요청이 온 지역으로 지원을 가려는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 혼자 그가 배치받은 곳을 향해 뛰어갔다. 십여 분쯤 달려 도착한 곳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그는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의 팀원들의 시체와 강화 인간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맡은 구역이었던 성당 앞에서 피로 얼룩진 비를 맞으며 그의 죽음을 깨달았지만 모르는 척 외면하였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거워진 발걸음을 이끌고 성당으로 올라가자 붉게 물든 채 차갑게 식어버린 너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는... 내려놓았던 그를 다시 안아 들고 절벽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포가 만들어낸 안개에 밑은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 높이라면...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안녕, 내 사랑. 다음 생에는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너를 만나 사랑을 하고 싶다. 평범하게 보통의 연인들처럼. 我爱你, Dei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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