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정장을 입고 코 위를 가리는 검은색 반가면을 쓰고 집을 나섰다. 싸울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고, 무거운 갑옷 대신에 정장을 입는 일이 많아졌다. 제 얼굴을 가려주던 투구를 정장 위에 쓰기에는 너무 언밸런스하다며, 드렉슬러가 늦었지만, 생일 선물 겸 주는 거라며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처음에는 투구와 달리 가벼운 감촉에 혹시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직접 벗지 않는 이상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처음 투구가 아닌 가면을 쓰고 회사에 나간 날, 모두가 자신의 가면을 극찬하였다.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움에 어디서 샀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어찌 답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살짝 그가 있는 장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가렸다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지인에게 선물을 받았기에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하며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양심에 찔리진 않았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그와 연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이었던 것 같다. 서로 바쁜 것도 있고, 기념일을 챙기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먹는 정도로 끝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답례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바쁜 업무에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최근 자신과의 만남을 꺼리듯 자신을 피해 다니는 드렉슬러의 행동도 한몫을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당장 오늘이라도 회사에 양해를 구해 일찍 업무를 끝내고, 그에게 줄 선물을 찾으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사로 가는 길,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굵어졌다. 거세게 내리는 비에 잠시 근처 상점에 들렸다. 금방 그칠 거라 생각한 비는 제 예상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그치지 않고 내렸다. 검은색 우산을 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내리는 빗소리가 구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일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겨우 도착한 회사는 입구에서부터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속 울음이 섞인 목소리도 드문드문 들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니 울고 있는 아이들과 조노비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홀든이 제 손을 잡고 따라와 달라며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끌려 자신이 향한 곳은 이사실이었다.여기는 왜? 그에게 의아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문을 열어주며 눈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그가 자신을 속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작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실로 들어가니 수척해 보이는 크루그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자 그제서야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회사 분위기가 이러냐고 묻자 그는 말없이 작은 상자를 자신에게 건네주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여니 상자 안에는 팔이 들어있었다. 그래 자신이 잘 아는 팔이 상자 안에 붉게 물든 채 들어있었다. 새파랗던 제복은 피에 젖어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있었고, 그가 자랑하던 창은 무엇인가에 절단된 듯 일부만이 남겨져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만을 빌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크루그먼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금고로 다가가 열더니 쪽지와 작은 열쇠를 꺼내 자신에게 전해주었다. 멍하니 제 손에 놓인 것들을 보고 있자니, 다리오가 죽었을 때 자신에게 전해주라고 부탁한 것이라며 자신은 분명 전해줬다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유품...인가? 그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잘게 떨리는 그의 뒷모습에 조용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쪽지에 적힌 곳을 향해 달렸다.
쪽지에 적힌 곳은 자신도 잘 아는 곳이었다. 자신도 자주 가는 곳이었으니까. 세찬 비를 뚫고 도착한 곳은 제가 사랑하는 이의 보금자리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피 냄새가 제 후각을 자극하였다. 피비린내를 따라 자신이 도착한 곳은 안방이었다. 새하얗던 시트는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곳곳에 튀긴 피와 부서진 물건들만으로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갔다. 쪽지에 적힌 곳은 이 안방 침대 바닥이었다. 침대를 옆으로 미니 작은 문이 보였다. 핏자국으로 범벅된 문고리를 보아하니 그가 이곳으로 도망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급한 마음 때문일까 자꾸 엇나가는 열쇠에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사다리에 다리를 걸치고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다 내려가니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어두웠던 시야가 갑작스레 밝아졌다. 급격한 변화에 눈을 감고 적응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조심스레 눈을 뜨니 제 눈에 들어온 것은 평온한 듯 눈을 감고 잠이 든 제 연인의 모습과 각종 가면과 창이 나열되어있는 방이었다. 정갈하게 입고 다니던 제복은 칼에 베인 듯 다 헤져 있었다.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생채기가 생긴 얼굴을 만졌다.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은 그가 더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입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덮어주었다. 그를 따뜻한 곳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안아 드는데 무엇인가가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몸을 낮춰 떨어진 것을 주웠다. 유일하게 붉게 물들지 않은 종이를 펼치니 종이에는 참으로 그다운 글이 적혀있었다.
[되도록 직접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잘 지내라.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이 더 큰 선물이었을 텐데 그에게 받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이렇게 떠나 보내야 하는 현실에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