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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로라드렉 2/14일 합작

2016. 1. 19. 19:41 | Posted by 아뮤엘

 너와 나의 관계는 언제나 그랬다. 그래,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처럼 타인이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연인의 모습을 우리는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물어봤다. 너희 둘 이러다 결혼하는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냐며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그의 미래엔 내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뭐 같은 일이었기에 떠올리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우리는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서로 같은 성별을 가진 이들의 사랑이라서? 주변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여서?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저 둘만의 시간을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했으니까. 불쾌하다.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머리 아프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더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두통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몰려오는 수마에 기대 생각의 늪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 깊은 어둠 속에 잠식되었다.


 눈을 뜨니 벽에 걸린 시계가 흐릿하게 보였다.

“11시...20분?”

아...망했다.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빌어먹을 회사라던가, 일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회사에 단 한 번도 지각을 해본 적도, 일을 게을리 한 적도 없는 저였기에 지금 이 상황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지각도 지각이지만 늦잠이라니? 눈을 비비고 다시 시계를 쳐다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 준비해서 씻고 회사를 간다 한들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오늘 별다른 일정도 없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불마녀의 잔소리도 잔소리지만, 그저 밖을 거닐고 싶었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하였다. 간단하게 씻을까 순간 고민을 했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도 그렇고 그냥 씻고 싶었다. 머리 위로 흐르는 찬물을 하염없이 맞고 있었다. 이러면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이 다 흘러 사라지지 않을까?

“...실없는 소리...”

차가워진 몸을 수건으로 닦고 욕실을 나서니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난 뒤라 그런지 고파오는 배를 안고 부엌으로 향하였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텅 비어있었다. 요 며칠 야근 때문에 밥 먹을 시간이 없었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다니... 생각해보니 욕실에 샴푸나, 휴지 같은 것들도 떨어져 있던 것이 떠올랐다. 집안일에 무심했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지만, 항상 도맡아 하던 이가 있었기에 딱히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아... 미치겠네.”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필요한 물품들을 종이에 적었다. 혹시 빼먹는 것이 있나 몇 번씩 확인하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사야 할 물품이 많았기에 다 들고 올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게 늘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마켓에 도착했다. 바구니를 들고 마켓 안으로 들어가자 신선함을 뽐내는 채소와 과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신선함에 이끌려 살까? 순간 고민했지만,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유통기간이 긴 통조림 따위를 주로 사고 신선한 과일 조금과 야채를 구매하였다. 이미 먹을거리로 가득 찬 바구니를 점원에게 부탁해 계산대에 맡겨놓고, 새 바구니를 들고 생활용품이 있는 곳으로 가 필요한 것들을 담았다. 필요한 것만 산다고 샀음에도 묵직해진 바구니를 보며 연구용품은 나중에 사기로 하고 돌아가는 길 베이커리에 들려 샌드위치와 바게트를 추가로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온 짐을 정리하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괜스레 그가 떠올랐다. 이번 출장지는 동양이라던데, 입맛이 까다로운 녀석이라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걱정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알아서 하고 돌아오겠지 라며 별생각 들지 않았는데 몸이 약해진 탓인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짜증났다. 샌드위치를 입에 털어 넣고 소파에 기대듯 누웠다.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가 떠올랐으니까,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혼자가 익숙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 무서웠던 걸지도 모른다. 마음을 주면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을 배신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자신을 바꾸어 놓았다. 그와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항상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어느새 빠져버렸다. 감추었던 감정들을 하나둘 일깨웠다. 조금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은 너라는 존재에게 침식당해 물들고 말았다. 이제 나라는 존재에게는 네가 전부인데,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어떡하면 좋지? 나는 네가 직접 표현해줬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날 너의 연인이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너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었는지 눈을 뜨니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 어슴푸레한 빛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굳은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불을 켜니 5시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보였다.

“으음... 어림잡아 10시간 정도 잔 건가?”

평소라면 운동을 하러 갔을 시간이지만, 어제 회사를 무단으로 결석한 것 때문에 쌓여있을 업무가 떠올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기로 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였다. 어제저녁을 먹지 않고 자서 그런지 평소보다 허기진 상태였기에 든든하게 먹을 생각이었다. 과일을 잘 씻은 다음 먹기 좋게 자르고, 딱딱해진 바게트에 마늘과 버터, 설탕을 섞은 소스를 발라 오븐에 살짝 구웠다. 소시지와 달걀까지 요리해 식탁 위에 올려놓으니 평소와 달리 풍성해 보였다. 요리하는 동안 내려진 커피를 곁들여 아침 식사를 하니 6시가 되었다. 그릇들을 깨끗이 설거지한 뒤,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말린 뒤, 평소대로 머리를 세팅하고 제복을 꺼내 입었다. 옷에 주름이 있는지 확인한 뒤, 서류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잘 정돈된 거리를 따라 걸으며 올려다본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다만 문제는...

“무단결근에 대한 처벌인가..?”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마녀도 마녀지만, 크루그먼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무거워지는 발을 겨우 이끌고 회사에 도착하였다. 빠르게 사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어둠이 감도는 사무실에 불을 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깨끗한 자신의 책상이었다. 무단결근을 했으니 어제 분의 서류가 쌓여있어야 정상인데, 왜? 자신에게 누군가가 설명해줬으면 좋겠지만, 사무실에는 그 궁금증을 풀어줄 이가 없었다. 일단 계속 서 있는 것보다 자리에 앉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개인 물품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여니 곱게 접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종이를 꺼내 펼치자 안에는 낯익은 필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아파서 쉰다고 설명했으니 걱정 마시길.’ 크루그먼인가. 어제 못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일찍 왔더니, 크루그먼의 배려로 할 것이 없다니. 나중에 고맙다고 술 한 잔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출근 시간이 되었는지 하나둘 늘어가는 목소리에 기지개를 켜니 주변에서 자신을 봤는지 괜찮냐는 질문이 날라왔다. 이제 괜찮으니 신경 끄라는 대답을 해주고 하나둘 올라오는 서류를 처리하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흘렀다. 쌓여가는 서류에 욕을 날리다가 불마녀에게 잔소리 듣고, 돌아가는 길 크루그먼과 홀든을 끌고 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 네가 없는 옆자리를 그리워하기도 하며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발렌타인데이라고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 초콜릿 향에 머리가 아파졌을 무렵이었다. 꼬마 아가씨가 선물이라며 주는 상자를 가방에 넣는데, 홀든이 어떤 여성이 자신을 밖에서 찾고 있다며 나가보라고 말했다. 자신을 찾아올 여성이 있던가? 가문과 관련된 사람이겠거니 하고 나갔더니 모르는 여성이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말하며 자신의 팔을 이끌었다. 여성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였고, 더군다나 장소가 회사였기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녀를 따라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서자 점원은 창가 쪽으로 안내하였다.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자신에게 무엇을 마시겠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괜찮다고 답하였다. 알겠다며 커피 두 잔을 내달라고 점원에게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오늘은 야근확정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데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베르토 씨와 친하시다고 들었어요.”

“...엉?”

“같이 동거를 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사실인데, 그게 아가씨랑 무슨 관련이 있지?

“저는 머지않은 미래에 그의 여자가 될 사람이거든요.”

당당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한 여인의 모습에 허탈해졌다. 그 녀석도 한 가문의 장자이니 약혼녀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가뜩이나 그 녀석과의 관계에 대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고민이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애소설 속 상황이 재현될 줄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결국 그 녀석이 입이 아닌 타인의 입으로 이별을 통보받는 것인가? 기분 참 더럽네. 살짝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자신의 모습에 확신을 얻은 것인지 여자는 말을 이었다.

“그에게 전해 듣지 못했나요? 다가오는 봄에 그와 결혼을 할 예정이거든요.”

“......”

“이제 전쟁놀이는 그만두고 그도 가업에 집중해야 하니까 회사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제 생각엔 당신이 걸림돌인 것 같아서 말이죠. 우리 그이에게서 떨어져 주시겠어요?”

“하아, 그래. 내가 떨어진다고 하면 얼마를 줄 예정이지?”“이 정도면 당신 복 받은 줄 아세요. 서민한테 이렇게까지 돈을 주는 거 흔치 않거든요.”

“서민? 내가 아무리 가문에서 제명당했다고 그렇지, 서민이라.”

“네?”

여인이 전해준 봉투에는 꽤 큰 금액이 적힌 수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금액 말인데, 내가 가진 재산의 1/10도 안 되는데 어쩌지? 저기 아가씨 소설을 많이 읽었나 본데 상대를 봐가면서 써야지. 예쁜 얼굴도 아닌데 머리도 나빠서 어쩜 좋아, 응?”

“ㅁ..무슨! 제가 누군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거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평소보다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인물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알베르토 씨! 저기 저 남자가!”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네? 얼마 전에 파티에서 뵈었는데...”

“아, 그것보다 레이디가 왜 여기에 이 사람과 같이 있는지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남편이 될 사람의 주변 잡초는 정리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누가 레이디의 남편입니까? 적어도 저와 그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하아? 무슨 소ㄹ”

“저는 이미 평생을 함께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레이디는 아닌 것 같군요.”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그의 말에 여성은 일어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꾹 다물고 울먹이는 여성을 보고 있자니 알이 제 팔을 이끌었다.

“야, 알? 잠시만 야!!”

“뭔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출장은 어쩌고?”

그를 본 것은 좋았지만 분명 다음 주쯤 도착한다던 그가 벌써 돌아오다니.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지금쯤이면 이곳으로 오는 배에 있는 것이 정상인데.

“아, 어느 여행자에게 도움을 받아 빨리 돌아올 수 있었네.”

“일은?”

“어제 보고도 다 했다네. 가장 먼저 자네를 보고 싶었지만, 자네가 회사에 없더군.”

“...집에 오면 되잖아.”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었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도착한 곳은 집이었다. 회사에 갔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과 쏟아질 잔소리에 대해 걱정을 하며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전보다 살짝 길어진 머리에 자신의 걱정대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는지 살이 빠져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출장 많이 힘들었냐?”

“가서 고민했네. 자네가 우리의 관계에 지루해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

“나는 두려웠네. 앞을 나가는 순간 변할 것들이.”

그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여행자가 그러더군. 변화를 두려워하는 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다만, 그것을 이겨내느냐 아니면 계속 두려워하느냐의 차이라고.”

이어 자신의 왼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 뒤로 몇 날 며칠을 생각해보았지만,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자네를 잃는 것이었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상자 속의 물건을 꺼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지에 끼웠다.

“나와 평생을 함께해주겠나?”

[로라드렉] Piano -1-

2015. 12. 28. 23:58 | Posted by 아뮤엘

 그의 집 거실에는 새하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언제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피아노는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다. 그래, 자신이 아는 한, 그와 알아온 그 긴 시간 동안 피아노는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가끔 피아노가 망가지지 않도록 그가 직접 조율하였다. 소중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공들여 조율을 하고 난 뒤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를 쓰다듬다 이내 제 시선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머리를 살짝 누르고 연구실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그의 시선을 항상 사로잡는 그 피아노가 얄미워 그가 잠시 외출하러 나간 사이 건반을 덮고 있는 덮개를 한쪽으로 치우고 뚜껑을 열었다. 그가 피아노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기에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매일 깨끗하게 피아노를 닦기 때문에 티클 없이 새하얀 건반이 나열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과 달리 가운데 부분의 건반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 잉크가 떨어졌었나? 평소 피아노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그가 했을 리는 없고…. 잉크가 아닌 무언간가? 솟구치는 호기심에 연분홍빛 건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익은 냄새가 제 코끝을 스쳤다. 비릿한 냄새. 옅지만 이 냄새가 자신이 익숙히 아는 그것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인가?"

“…. 누구 멋대로 피아노에 손대래!!"

자신을 거칠게 밀쳐내는 손길에 바닥에 엉덩방아 찧고 말았다. 둔부를 타고 올라오는 가벼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올려다본 렉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자신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온 그가 오늘따라 얄밉기도 했지만,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일을 몰래 하다 걸렸으니 자신의 잘못이 컸다.

"미ㅇ..."

"...됐고 물건 덜 사온 거 같으니까 가서 사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알겠다고 말하며 지갑과 겉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그는 작게 어깨를 떨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문을 닫고 한 계단 두 계단 내려오다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우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그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필요할 때만 말을 걸어왔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와 같이 보낸 수년간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생도 시절 밖에서 온 연락에 급히 뛰어갔던 그가 늦은 밤 붉게 물든 눈으로 들어왔던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폭풍전야처럼 느슨한 듯, 팽팽하게 지속되던 분위기는 집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고, 그는 그대로 특유의 벽을 치고 있었기에 사무실 내의 공기는 평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빨리 일을 하라고 소리쳤을 조노비치양도 첫날 렉스에게 잔소리를 한 뒤, 재촉을 포기하였다. 평소라면 장난치듯 짜증을 내며 답했을 그와 달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반응에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다른 동료들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르겠다고 모르는 척 대답하는 것밖에는...


 분위기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고 결국 조노비치양이 폭발하였다.

“당신,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거 다른 사람에게 피해인 건 알고 있지?”

“......”

“불만이 있으면 당사자랑 해결을 보던가 왜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해?”

“아, 그래? 미안”

“하,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

“그럼 지금 여기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풀려? 그리고 이럴 시간에 네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 지금 말 ㄷ...”

“미안하네, 조노비치양.”

그녀의 손에 작게 일렁이는 불꽃을 보고서야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렉스를 자리에서 끌어내었다. 아니 끌어내려고 하였다.

“뭔데? 네가 왜 사과를 해?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냐?”

자신의 손을 단호하게 쳐내는 그의 손길에 멈칫하였지만, 그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조노비치양 말대로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기에 주변에 큰 피해를 주었고 렉스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깨닫는 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시발, 야. 안 놔?"

잡힌 손목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를 애써 외면하고 옥상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장소를 벗어나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까? 그가 할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말하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등이 얽혀 정작 하고 싶었던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목적지였던 옥상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찼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는 렉스와 자신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겠다, 그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새끼... 힘만 세서 붓게 생겼네.”

렉스는 자신이 잡았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은 손을 숨겼다.

“미안...하네. 많이 부었나?”

“네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뭐냐, 날 데리고 나온 이유가?” 평소라면, 아니 예전 같았으면 네놈 때문에 죽겠다며 대신 일 하라고 말해왔을 그인데 선을 긋는 그의 모습에 망설여졌다. 괜찮은 걸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지?

“뭐야? 보아하니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인데, 생각이 정리되면 말하던가.”

근처 벤치에 앉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목에 걸린 십자가를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네.”

“뭐가 미안한 건데? 네가 딱히 미안해할 게 있던가?”“자네의 상처를 건드린 것도, 자네를 울린 것도, 그리고 자네에게 상처를 입힌 것도 모두 미안하네.”

“......그렇게 잘 아는 새끼가 도망쳤냐?”숙인 고개 사이로 꾹 다문 입술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 자네가 더 힘들어할까 봐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으로 피하려고 했네.”

“하, 평소엔 그렇게 용감하고 눈치 없는 놈이?”“상처받은 자네에게 내가 다가감으로써 더 큰 상처를 줄까 두려워서...”

“씨발. 진짜, 좆같게.”

그는 붉게 부어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작게 흔들리는 어깨와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가 울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어깨를, 무너져 내린 그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며 다독여주었다. 그래, 다시는 그를 울리지 않겠다고 맞닿은 체온에 맹세하였다.


 그 날 이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무실의 분위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잔소리하는 조노비치양과 그걸 장난스럽게 넘어가는 렉스,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전보다 더 활기차진 것 같았다. 회사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렉스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 같았으면 서로 피하고 모르는 척 넘어갔을 것들을 서로 감싸주게 되었다. 지난 일로 서로 오해를 하고 상처받고 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크루그먼의 배려로 일찍 퇴근하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고 쉬기 위해 소파 앉아있는데 렉스가 양주를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술잔을 건넸다. 한 잔, 두 잔 말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라왔다. 눈앞이 흐릿해져 갈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도 취해있는 상태라 띄엄띄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상심에 빠져있던 그를 도와준 알비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생도 시절 휴일마다 빠져나가 만난 사람 또한 그 알비라는 남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병이 있었는데 그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숨기는 것이 없냐고 물어왔지만, 이미 그에게 다 말해주었기에 더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싱겁다는 듯 투정을 부리다 이내 제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저 피아노가 알비라는 사람의 것이었다는 것과 생도 시절 렉스가 급하게 외출했던 것이 그와 연결되어있다는 것 등 알비라는 사람이 드렉슬러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엿볼 수 있었다. 분하지만, 이미 멀리 떠난 이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신이 렉스 안에서 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지 말이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 피아노는 저렇게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강요하고 싶진 않았기에 새하얀 피아노는 장식용으로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예전보다는 많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선을 그어놓은 듯 그 선을 넘어가려고 하면 그는 자신을 거부하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완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계절은 흘러 푸르던 나뭇잎들이 화려한 치장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회사에서 긴 야근 주간이 끝난 기념으로 오랜만에 그와 같이 요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집에 있는 식재료로 미리 준비하기로 하고 자신은 필요한 물품을 장보기로 하였다. 자주 가는 가게에 들려 종이에 적혀있는 식재료들을 사고 나서는데 점원이 서비스라며 사탕이 들어있는 작은 병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안 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단골손님 서비스라는 그녀의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렉스가 기다리고 있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 맛있는 냄새가 제 코를 자극하였다. 재료만 손질한다더니 결국 요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품에 안은 식재료들을 안고 부엌으로 향하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고 있던 식재료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육수를 내는 그의 뒤로 가 꼭 끌어안았다.

“왔냐?”

“아아, 무슨 요리를 하려고 육수를 내고 있는 건가?”

“네가 파에야 먹고 싶다며, 싫으면 하지 말까?”

“싫을 리가 있나.”

“그럼 육수 좀 보고 있어. 나는 네가 사온 재료 좀 다듬으련다.”

제 품에서 벗어나 식재료가 담긴 봉투 쪽으로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육수가 잘 우러났는지 확인을 하고 야채를 볶기 위해 팬에 기름을 두르는데 렉스가 무언가를 들고 제 쪽으로 다가왔다.

“야, 이건 뭐냐?”“아아, 그거. 가게 점원이 단골 선물이라며 주더군. 사탕 같던데 자네 피곤할 때 먹으면 좋지 않을까?”

“흐음.. 한 번 먹어볼까?”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 마개를 제거하자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렉스는 사탕하나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입에 넣었다.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이내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무진장 달다. 너 못 먹겠는데?”

“달지 않은 사탕이 어딨나?”

“이건 꼬맹이들이 즐겨 먹는 것보다 더 단데? 어, 이거 사탕 안에 시럽 같은 것도 들어있네?”

“그 정도인가? 그것보다 시럽이라니 신기하군.”

사탕 안에 시럽이 들어있다며 신기하다고 하나 더 꺼내먹는 렉스를 보다 하나 먹어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으나, 꼬마 아가씨들이 즐겨 먹던 사탕의 단맛을 떠올리니 맛보려던 마음이 싹 가라앉았다.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맛있게 먹는 렉스를 보니 굳이 먹을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육수도 다 우러났고 야채를 볶는 과정도 끝났기 때문에 가스 불을 끄고 빈 그릇에 옮기는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 큰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놀라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니 렉스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머리가 굳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풀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잡아 전화기를 잡았다. 주치의의 번호를 떠올리며 번호를 입력하였다. 제발... 빨리 전화를 받길.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는 주치의에게 렉스의 상태를 설명하니 그는 최대한 빨리 갈 테니 도착할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계속 시행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였다. 렉스를 똑바로 눕히고서 주치의가 말한 대로 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괜찮을 거라고 주치의가 와서 그를 살려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치의는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놓아주라고, 그는 이미 떠났다고. 외면하고 싶었다. 감긴 두 눈이 장난이었다는 듯 자신이 좋아하던 푸른빛을 다시 한 번 빛내며 자신을 담길 바랐다. 차갑게 굳어버린 몸이 움직이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그를 나는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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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거리, 온 마을에 신나는 캐럴이 이른 아침부터 울려 퍼졌다. 연말에 가까워지자 밀려오는 서류들로 인해 바로 어제까지 이 주 동안 야근을 했던지라 자신의 수면을 방해하는 소음이 반가울 리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잠을 취하기 위해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려 봤으나 이미 잠이 다 깬 뒤였다. 잠이 깬 김에 나가 간단한 아침을 먹을까? 고민했으나 제 몸을 부드럽게 감싸오는 이불의 촉감에 벗어나기가 싫어졌다. 배는 고픈데 이불 밖으로는 나가기 싫고 어찌하면 좋을까 뒹굴 거리며 고민하길 십 여분이 지났을 무렵 끼익-거리며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죄지은 사람처럼 꼼지락거리던 몸이 굳어 뻣뻣해진 상태로 잠든 척 해보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통하지 않았다.

"Merry Christmas! 렉스. 푹 잤는가?"

"아아. 너도 잘 잤냐?"

 깨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이불을 걷어내고 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는 녀석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손을 내밀자 알베르토가 따뜻한 커피와 토스트가 담긴 쟁반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무안해진 손을 뒤로하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알베르토를 쳐다보니 싱긋 웃으며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어디까지 하나 가만히 보고 있자니 버터가 아닌 딸기 잼을 토스트 위에 듬뿍 얹어 바르기 시작했다. 알베르토가 단것을 즐겨 먹었던가? 자신도 약간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듬뿍 얹어 달게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더욱 이상해 보였다.

'사실은 꿈속이었다던가 그런 건가.'

 딸기잼을 바른 반대 부분에는 버터를 바르고 있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보며 현재 자신이 있는 공간이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고 말았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보다 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머그잔에 손을 뻗는데 토스트 괴롭히기가 끝났는지 이제는 제 커피마저 빼앗은 알베르토의 행동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야... 알. 이게 뭐하는 짓이냐?"

"자네의 아침을 챙기고 있지."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럴 리가."

 씨익 웃어 보인 알베르토가 잼과 버터로 범벅된 토스트를 반으로 접어 제 입에 넣었다. 순간이지만 제 입안을 유린하는 지나치게 단맛과 느끼함에 재빨리 접시에 뱉어버리고 말았다. 버터까지는 괜찮았다. 다만, 평소에 즐겨 먹던 잼이 아닌 시판용 잼인지 혀가 마비될 정도의 단맛을 가진 딸기잼이 문제였다. 입안 가득 채운 단맛을 빨리 없애버리고 싶었기에 알베르토에게 커피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제 말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제 커피를 홀짝이는 그의 모습이 얄미워 보였다.

"..야, 알... 너 이게 뭐하는 짓이냐?"

"자네의 아침을 챙기고 있다네."

"괴롭힘이 아니고?"

"괴롭힘이 아니라 내 애정이니 걱정 말게."

 그에게 잘못 한 것이 있었던 걸까? 최근 서류를 처리하느라 서로 바빠, 그에게 잘못했던 것은 없었을 텐데...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요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되짚는데 제 귓가에 들려오는 캐럴에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성탄절 약속... 오늘..이었...지?"

"흐음"

 빙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인지 괜한 토스트를 커피에 넣어 죽을 만들며 제 시선을 피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졌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을 왜 까먹고 만 것일까? 분명 오전에 성당에 들렀다가 데이트를 하기로 했었...지... 굳어지는 몸을 가까스로 돌려 시계를 보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출한다고 들떠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무릎 위에 놓여있던 쟁반을 옆으로 치우고 침대에서 벗어나 옷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여기에..."

 바쁘다고 그냥 집어 던져 놓았더니 물건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것저것 얽혀있는 물건들 사이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되어있는 상자를 꺼내 뚱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알베르토 방향으로 던졌다.

"야!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받아라."

"어...??"

 얼떨떨한 얼굴로 선물을 받아 포장을 푸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약속을 잊었던 자신의 잘못이긴 했지만 공들였던 만큼 제대로 주고 싶었는데... 뭐 이래나 저래나 전해줬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알베르토의 반응을 기다렸다. 야근하는 도중 틈틈이 만드는 바람에 좀 더 세밀하게 세공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그래도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게 만들어져 마음에 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밖에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그의 모습이 답답해 만들게 된 것인데, 마음에 들까 걱정이 되었다.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벽에 기대 그의 반응만을 기다렸다. 이리저리 만져보고 얼굴에 검은색 반가면을 쓰고 거울을 보더니 자신에게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기는데 언제 다가온 건지 자신을 꼬옥 안아 품 안에 가두었다.

"야...알? ㄱ...괜찮냐?"

"날 위해 직접 만들어 준 건가?"

"어...엉... 딱히 누구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내가 만드는 게 나으니까?"

"고맙네, 렉스."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인지 언제 삐졌냐는 듯, 자신을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는 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야근을 하면서 널 위해 틈틈이 만든 거니까, 영광으로 알라고! 크으, 역시 난 천재야."

"야근이라면 피곤했을 텐데..."

"멋진 얼굴 나만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답답하니까, 밖에서 투구 대신 쓰고 다녀라."

"아... 곤란하네, 렉스"

"ㅇ... 엉?"

 갑자기 안아들어 침대 쪽으로 향하는 그의 행동에 놀라 그를 밀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ㅇ...야...알?? 이건 아니지. 낮인데?"

"예쁜 말로 날 유혹한 건 자네 아닌가?"

"우리 나가기로 했잖아? 레스토랑 예약도 해놨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오랜만에 운동이나 하는 게 어떨까, 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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