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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빛이 도는 은백색의 아름다운 꽃

이 꽃은 처음 가문을 세운 조상께서 사랑했다는 여인이 묻힌 자리에서 피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슬피 우는 그가 안쓰러웠는지 새벽이슬을 머금고 핀 꽃은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저택으로 돌아가 일단 휴식을 취하자는 다른 이들의 말에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며 꽃잎이 상할까 조심스레 채집해온 꽃은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사라져버린 꽃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에게 찰나의 행복을 보여준 이 꽃에게 가문의 이름을 따 '홀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보는 자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이 꽃은 생김새도, 피어나는 장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이야기만 전해져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유모에게 자주 들었던 꽃의 전설은 어린 자신과 형들에게 호기심 대상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떠한 행복을 가져다줄까?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른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라며 쓴웃음을 지으셨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기에 어른들도 아직 못 봤나 봐! 하고 넘겼지만 16살이 되던 해 왜 어른들이 그러셨는지 알게 되었다. 대가 없는 행복은 없는 법, 그래 언제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였다. 왜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항상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오랜만에 바쁘신 부모님과 형들이랑 외출하게 되었다. 가족에게 소홀히 해서 미안하다며 아버지가 시간을 내셔서 바닷가에 있는 별장에 놀러 가게 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함께 놀러 간다는 사실 하나로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산책이나 할까…?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켜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연못 가까이에 다다랐을 무렵, 달빛에 비쳐 은은하게 빛나는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기가 감도는, 달빛으로 인해 아름답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사라질듯한 분위기.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꽃이 이야기에만 나오던 그 꽃일 거라는 것을. 가져가 보았자 사라질 게 뻔했기에 제자리에서 소원을 빌었다. 행복한 여행길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별 탈 없이 다녀올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의 소원에 답이라도 하듯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꽃을 보고 작게 미소를 답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잠자리로 향하였다.


 꽃이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가족끼리 간 여행에서의 일정은 사고 없이 즐겁게 마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형들과 먼저 저택으로 돌아왔다. 잠시 들릴 곳만 들려 바로 따라오신다던 부모님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별일 아닐 것이 분명하니 기다려보자는 큰형의 말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형들도 걱정에 푹 잠을 자질 못했는지 수척한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식당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새하얗게 질려 달려오는 집사의 표정에 우리는 직감했다.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집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이제는 부모님과는 만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돌려 말하고 있지만, 그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작스러운 산사태가 마차를 덮쳐 그대로 파묻혔다고 한다. 주변의 인력들을 끌어다 흙을 파헤쳐 보니, 부모님은 안 계시고 부모님의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만 발견되었다고 말하였다.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살아계실 확률도 있다며 작은 형과 나는 열심히 부모님의 생사를 주장했다. 큰형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견에 동의하는지 재수색을 요청하였다. 끈질기게 물고 매달렸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서 부모님이 곁에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매달렸다. 돌아가셨을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였다. 그래, 그 강하던 부모님이 고작 산사태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결국, 수색 일주일 만에 흙투성이가 된 부모님을 찾을 수 있었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부모님의 모습에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죽음을…. 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사망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산사태로 인한 사고사가 두 분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 두 분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필요한 의식들을 잘라내고 이틀에 걸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몇몇 가문의 가주들과 지인들을 불러 간략하게 식을 치렀다. 뭐 간략하게 치른다고 하였지만, 알리진 않았어도 어디서 알고 온 건지 쥐새끼처럼 찾아온 방계혈족이 찾아와 식이 너무 단출하다, 형님이 위에서 화를 내시겠다, 이래서 어린 애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따위의 소음을 지껄였다. 쫓아내고, 쫓아내도 어디로 들어오는 것인지 결국 초대했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모든 이들을 저택에서 내보내고 나서야 겨우 조용해졌다. 어둠이 찾아올 새 없이 화목하고 웃음이 넘쳤던 예전과 달리 무거운 어둠이 지배하는 저택에는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루드이작/루드작] Erlösung -2-

2016. 10. 27. 00:23 | Posted by 아뮤엘

 [절망 속에서 내밀어진 작은 손은 무척이나 눈부셨다. 바닥으로, 아니 그보다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만 하던 나날이 즐거워졌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쫓겨 다녔다. 이유는 모른다. 어머니조차 그를 외면했지만, 그의 자식이라는, 가족이라는 꼬리표는 항상 우리를 따라다녔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지만, 꼬리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책임지지도 못할 씨앗들을 뿌려 놓은 덕에 우리 가족은 언제나 가난했다. 남의 집 일을 하느라 얼굴조차 보기 힘든 어머니,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낡은 집은 더러워졌고 냄새까지 나기 시작했다. 첫째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 가끔 물을 길어 강가에 나갈 때면 돌을 던지는 아이들, 숙덕거리는 마을 사람들로 인해 아주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각에 나갈 수 있었다.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상황이. 나는 더럽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매일 이렇게 상처가 나도록 몸을 닦고 닦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며 배척하고, 돌을 던졌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나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존재인데 왜 나만? 그 설움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동생들 앞에서는 울 수는 없었다. 그래, 몸에 밴 습관들은 나를 끝까지 죄어왔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좁고 어두운 곳을 찾아 작은 몸을 숨기고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렸다.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새어나가는 울음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얼굴을 무릎에 품고 최대한 소리를 죽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자꾸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근처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에게 들키면 성가셔지니까, 재빨리 눈물을 닦고 도망치자는 생각에 대충 눈가를 소매로 잡고 일어섰지만, 자신을 붙잡는 손길이 더 빨랐다.


“천사님, 여기서 왜 울고 있어?”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사? 누굴 보고 하는 소리지? 설마 나인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붙잡힌 손을 빼내어 도망치려고 했지만, 제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남자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응? 대답 좀 해주지, 그래?”


아, 얼굴도 다시 보고 싶네~ 라고 덧붙이며 말을 걸어왔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나를, 피하지 않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도망가야 된다는 생각보다 상대가 누구인지 보고 싶어졌다. 그래, 왜인지 몰라도 가슴 한구석에서 그라면 믿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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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이작/루드작] Erlösung -1-

2016. 10. 25. 01:19 | Posted by 아뮤엘

 [내가 이 지독한 꿈에서 깼을 때, 잘 잤어? 라고 말하는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 십 번을 해. 이 모든 것이 꿈이고 사실은 둘이서 태양과 달이 잘 보이는 언덕 위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를 잠식하고 있는 불쾌한 기억의 시작은, 그래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된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 아주 어린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일 모든 일의 시작을 따지자면, 자신을 찾아온 한 무리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그러니 세상을 위해 자신들에게 맡겨달라고 말했다. 불길한 느낌이 드셨는지, 아버지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 방문자들을 잠시 문밖으로 쫓아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돈과 식량을 챙겨주고, 마룻바닥의 숨겨진 통로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멀리 도망가라고, 자신은 여기서 그들을 막을 테니, 아니, 곧 따라갈 터이니 걱정 말고 먼저 가라고 웃어 보이며 어머니와 자신을 차례로 포옹하고 그대로 통로의 문을 닫았다. 아버지도 곧 따라오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어렸던 나도 알았던 것 같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란 걸.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피해 도착한 마을에서 우리는 쉴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독일이 아닌 체코의 한 마을이었다. 마을의 한쪽은 강으로, 다른 한쪽은 숲이 있어 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어머니도, 나도 꽤 오랜 도망생활에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이만하면 추적자들도 포기했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사는 것도 좋았겠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다행히 숲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집이 있었다. 버려졌다? 라기에는 생각보다 깔끔한 집이었기에, 주위에서 나뭇가지와 흙을 주워다 부족한 부분만 수리하였다. 하루만 잔다고 한다면 그냥 자도 되겠지만, 살아야 했기에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옆에서 어머니를 도우다 마을로 내려가 필요한 식재료를 사 오는 것이 다였다. (다행히 마을에 오가는 사람은 많았는지 외지인에 대한 배척은 없었다) 가끔 입이 가벼운 상인들에게 얻는 정보도 있었기에 하루에 한 번씩은 마을로 내려갔다. 이것저것 얻은 정보는 많으나 보통 쓸모없는 내용이 다수였지만 유용한 정보도 다수 있었다. 예를 들면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집이 원래 살던 주인이 수도로 올라가면서 버렸다던가, 신흥종교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사실 정확한 의미 모를 이야기도 많았지만 귀담아들어 두었다 집으로 가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께 말씀드리곤 했다. 그럼 어머니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셨다.


 마을에서의 삶이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열매를 구분하여 딸 수 있게 되었다. 트랩을 만드는 것에도 능숙해져(마을 사람에게 배웠다.) 작은 짐승을 잡아와 요리해 먹기도 했다. 가끔은 어머니와 같이 강가에 가서 물놀이하다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어머니가 빨래하실 때면 마을 중앙 분수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이날도 평범할 것 없는 날이었다. 빨래하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분수대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끔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 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평범하게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오길 바라며, 앉아있는데 저 멀리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어 넘어갔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때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그날따라 그 작은 소음이 무척 신경 쓰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찾아간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는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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