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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드렉] 달맞이꽃 -1-

2017. 2. 22. 23:41 | Posted by 아뮤엘

“좋아하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관심 없다.”


꽤 단호한 거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는 익숙해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들고 있던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곤 내일보자며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혀가 아릴정도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인한 피로감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처리하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서류더미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뻐근한 몸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어주었다. 시계를 보니 4시가 조금 지나가는 시각이었다. 


서류도 다 제출하고 승인까지 받았겠다, 다른 일도 없으니 조금 이르지만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고 겉옷을 걸쳤다.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지갑까지 챙기고 방문을 나서자 조노비치의 얼굴이 보였다.


“벌써 퇴근 하는 거야?”

“설마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런 일로 찾아온 거 아니니 걱정마. 그렇지 않아도 일찍 퇴근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온건데 전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서 말하려던 참이라고 대충 둘러대며, 방문을 잠갔다. 내일 보자며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시작은 그래, 별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전날 연이은 야근을 배려하듯, 일찍 끝난 업무에 알과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단골 식당에 들렸다 나오는 길, 오랜만에 별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사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상쾌한 바람과 함께 별들이 맞이해주었다. 오랜만의 휴식인데다가,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생도시절이야기, 회사에서 있었던 일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어느새 늘어난 술병들로 인해(집에서 술을 더 가지고 올라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알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렉스. 혹시라도 이 긴 전쟁이 끝난다면, 뭘 할 예정인가?”

“흐음... 글쎄다? 만약,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모든 걸 내려놓고 긴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이라... 여행도 좋지, 그래.”


들고 있던 잔을 내용물을 비우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 잔에 남은 술을 따라 마셨다. 별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날따라 술은 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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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Ricardo

2016. 11. 18. 00:12 | Posted by 아뮤엘

눈이 내린다.

너를 닮은 새하얀 눈이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색색의 건물들은 새하얗게 물들어가고 크고 작게 들리던 소리도 하나둘 가려져 갔다.


11월 17일

너와 내가 만난 날.

처음으로 이름을 가지게 된 날.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생긴 날.

처음으로 친구라는 존재가 생긴 날.

너와의 긴 인연이 시작된 날.


뽀득-

걸을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왠지 정겨웠다. 생각해보니 생일에 눈이 내리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그리운 추억들….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래 마피아에 거두어지기 전까지는 언제나 둘이 함께였다. 그러다 우리를 눈여겨본 그들에게 거두어지고 나서는 조직 원들이 축하해 주었다. 너는 언제나 따로 방을 찾아와 생일을 축하한다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날은 너와 같이 잠을 자는 날이었다. 뭐 이건 네 생일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더 크고 나서는 카포로서의 일이 바빠 서로의 생일을 챙기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다른 이들의 축하는 필요 없었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바빠도 조금 늦은 시각이라도 서로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런 날 중에서도 눈이 내리는 생일은 언제나 특별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모든 일을 미루어두고, 약속이라도 한 듯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그리고 너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에서 밥을 먹고, 너의 집에서 와인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너에게 우리는 이미 끝난 연일 텐데, 나는 눈이 내린다는 이유로 하던 일을 내려놓고 집을 나섰다. 큰길을 벗어나 좁고 좁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고 나서야 작은 공터가 나왔다. 버려진 옷가지와 벽돌 따위로 만들어진 작은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거리에 버려져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던 우리가 살았던. 둘이서 살 집이니 바람이나 비에 무너지면 안 된다고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녀 재료를 주워와 공들여 만들었었다. 겨우 만든 집은 며칠 살지도 못한 채,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우리는 옛 추억을 그리듯 종종 이곳을 찾았다. 지금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은 집이지만 예전이 그리워져 몸을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집 안에는 색색의 조약돌과 쓰레기만이 남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것들도 있는걸 보면 집을 잃은 고양이가 가끔 쉬어가는 쉼터가 된 모양이었다. 씁쓸해지는 마음을 삼키고, 커지는 하얀 눈송이에 근처 건물 아래로 들어가 눈을 피했다. 네가 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미련이 이곳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으니까, 춥지 않으니까 좀 더 기다려 볼까? 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새하얗던 세상이 어둠에 잠식될 때까지 너를 기다렸다. 


 드문드문 들려오던 소리와 건물의 불빛이 하나둘 사라져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추위에 굳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굳은 몸을 간단히 풀고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왔다. 어두워진 거리에는 흐릿하게 빛나는 가로등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정말 떠나버린 거구나. 아릿해져만 오는 가슴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나를 거부한다고 하여도 난 널 지켜야 했다. 그 어둠으로부터. 그게 날 구원해준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답이었기에. 다만, 이 아파지는 마음을 난 어찌하면 좋은 걸까? 떨구어진 머리가 초라해진 나의 그림자를 더 작게 만들었다. 눈 위로 툭툭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고요한 거리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뽀득- 뽀드득-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익숙한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손길을 따라 옮긴 시선 끝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네가 있었다.


“여전히 미련하군. 포기라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유를 묻는건가? 그렇다면 답해주지. 생일 축하한다, 리키”


제 품에 안긴 그의 따뜻한 온기를 나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게 꿈은 아닐까? 네가 혹시나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리고 그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아아,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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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에 긴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안심되었던 것일까? 지독한 악몽은 찾아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어가는 시각, 쓱 방을 둘러보니 메이드가 두고 간 것인지, 간단한 아침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배가고파오긴 했지만, 뻐근한 몸을 풀고 싶었기에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물에서 몸을 풀고 있자니 배가 고파 결국 아침 식사를 욕조에서 먹고 말았다. 몸도 풀고, 고픈 배도 채우니 일석이조였지만, 그 모습을 유모에게 들켜 혼이 나고 말았다. 30분가량 혼이 났을까? 그제야 본 목적이 떠올랐는지, 유모는 빨리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가라는 말을 전하고 방을 나섰다. 물론 나서면서 다시는 욕실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하지 말라 단단히 일렀다. 유모에게는 일단 알겠다고 답을 하고 방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단순한 와이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집무실로 가는 길, 주방에 들려 아침 식사가 놓여있던 그릇을 반납했다. 점심은 조금 늦게 먹고 싶다고 주방장에게 이르고 도착한 집무실에는 작은 형과 큰 형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오랜만에 만나는 형들은 반가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뒤이어 들어온,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인물이 그 대화를 막았다.


“호오, 그 작던 아이들이 많이도 컸구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숙부님.”

“…….”

“…….”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는지 뒤룩뒤룩 찐 손을 내미는 숙부를 보며 큰형은 사무적으로 인사를 나눴지만, 작은 형은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고 나는 그대로 쇼파에 앉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작은 형처럼 자리를 박차 나가고 싶었지만, 이 인간이 왜 왔나 궁금해 자리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와 말을 섞을 생각은 없었기에 집사가 가져온 차를 따라 마셨다. 그런 우리의 태도에 숙부는 기분이 상했는지 빠득 이를 갈았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 작던 삼 형제가 많이 컸군. 무가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윗사람에 대한 예절은 더 배워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타계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혼란스러워 그런 것이니 ‘어른’이신 숙부님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끌끌. 그래, 어른인 내가 이해해야지.”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꺼운 손으로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숙부는 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건, 나와 다른 분가들의 의견을 담은 제안이다.”


큰형은 봉투에 든 종이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접어 봉투에 다시 넣어 숙부 앞에 놓았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집사, 숙부님이 돌아가신다고 하는군. 배웅해드리도록.”

“네놈! 그러고도 네가 내 도움 없이, 이 가문을 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마차 떠나면 소금 좀 뿌리는 것도 잊지 말고!”

“이글, 말이 지나치다.”


얼굴을 붉힌 채, 역정을 내는 숙부를 끌고 나가는 집사에게 말을 덧붙였다. 한숨을 내쉬는 형과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숙부를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빈 잔에 차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