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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에 긴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안심되었던 것일까? 지독한 악몽은 찾아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어가는 시각, 쓱 방을 둘러보니 메이드가 두고 간 것인지, 간단한 아침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배가고파오긴 했지만, 뻐근한 몸을 풀고 싶었기에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물에서 몸을 풀고 있자니 배가 고파 결국 아침 식사를 욕조에서 먹고 말았다. 몸도 풀고, 고픈 배도 채우니 일석이조였지만, 그 모습을 유모에게 들켜 혼이 나고 말았다. 30분가량 혼이 났을까? 그제야 본 목적이 떠올랐는지, 유모는 빨리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가라는 말을 전하고 방을 나섰다. 물론 나서면서 다시는 욕실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하지 말라 단단히 일렀다. 유모에게는 일단 알겠다고 답을 하고 방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단순한 와이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집무실로 가는 길, 주방에 들려 아침 식사가 놓여있던 그릇을 반납했다. 점심은 조금 늦게 먹고 싶다고 주방장에게 이르고 도착한 집무실에는 작은 형과 큰 형이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오랜만에 만나는 형들은 반가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뒤이어 들어온,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인물이 그 대화를 막았다.


“호오, 그 작던 아이들이 많이도 컸구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숙부님.”

“…….”

“…….”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는지 뒤룩뒤룩 찐 손을 내미는 숙부를 보며 큰형은 사무적으로 인사를 나눴지만, 작은 형은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갔고 나는 그대로 쇼파에 앉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작은 형처럼 자리를 박차 나가고 싶었지만, 이 인간이 왜 왔나 궁금해 자리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와 말을 섞을 생각은 없었기에 집사가 가져온 차를 따라 마셨다. 그런 우리의 태도에 숙부는 기분이 상했는지 빠득 이를 갈았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 작던 삼 형제가 많이 컸군. 무가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윗사람에 대한 예절은 더 배워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타계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혼란스러워 그런 것이니 ‘어른’이신 숙부님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끌끌. 그래, 어른인 내가 이해해야지.”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꺼운 손으로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숙부는 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건, 나와 다른 분가들의 의견을 담은 제안이다.”


큰형은 봉투에 든 종이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접어 봉투에 다시 넣어 숙부 앞에 놓았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집사, 숙부님이 돌아가신다고 하는군. 배웅해드리도록.”

“네놈! 그러고도 네가 내 도움 없이, 이 가문을 잘 이끌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마차 떠나면 소금 좀 뿌리는 것도 잊지 말고!”

“이글, 말이 지나치다.”


얼굴을 붉힌 채, 역정을 내는 숙부를 끌고 나가는 집사에게 말을 덧붙였다. 한숨을 내쉬는 형과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숙부를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빈 잔에 차를 따랐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액체를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샘이 마르고, 억지로 참은 탓에 목이 감겼을 무렵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


 축축해진 소매가 거치적거려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닦았다. 눈가가 불게 물든 채 부어올라 천이 스칠 때마다 아파왔다. 몸도, 마음도 걸레 조각이 되었기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일찍 잘까? 침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 올린 물건은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그 와중에 놓지도 않고 들고 온 자신이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나중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기장을 비밀 서랍장에 넣었다.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사이 시트를 정리한 것인지 뽀송뽀송한 촉감의 이불이 자신을 반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다 깨는 것의 반복을 통해 지쳐 무척이나 얕은 잠에 빠졌다. 주변이 무척이나 고요했기에 그 고요하던 공기가 불청객으로 인해 흐트러졌다. 누굴까? 궁금했지만, 감긴 두 눈꺼풀이 무거워 뜰 수가 없었다. 눈꺼풀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나는 그냥 누워있길 선택했다. 사실 자신에게 적의가 없어 보이는 것이 제일 컸다.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은 불청객은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굳은살로 인해 거칠지만, 무척이나 따뜻한 손길. 나는 이 손길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일로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냥 방으로 가서 쉬지. 가슴 한편이 불편해져 잠결인 척 돌아누웠다. 그런 제 맘을 아는 것인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무책임했구나. 미안하다.”

형이 왜 사과하고 있는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다정한 손길에 이끌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조금만 버텨다오. 곧 마무리될 터이니. 모든 일이 끝나면 셋이서…….”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전해지지 않은 채 어둠에 잠식되었다.

 가문의 기둥이었던 두 분이 없다. 그 사실만으로 모두가 힘들어했다. 큰형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업무와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이른 나이에 즉위하게 된 부담감 때문일까?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이 많다며 최소한의 식사, 수면 시간 등을 제외하고서는 집무실과 서재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작은 형은 방문을 잠그고 자신을 가뒀다. 방 앞에 음식과 형이 원한 물품들이 담긴 트레이를 놓으면 빈 접시와 필요 물품이 적힌 종이를 놓는 것으로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하였다. 형들이 걱정되어 찾아가 봤다. 한눈에 봐도 수척해진 큰형은 자신에게 괜찮냐고 물어왔고 작은 형은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칼들이 연주하는 레퀴엠에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막내 도련님은 괜찮으십니까? 집사장이 물었다. 나는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지. 하루에도 수십, 아니 수백 번은 생각한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부모님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신다는 걸 막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 가족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들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후회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잠시 눈을 붙이면 악몽이 찾아왔다. 꿈은 항상 똑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숲을 뛰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살기 위해 뛰고 또 뛴다. 하지만 길의 끝은 보이지 않고 결국 지쳐 어둠에 먹히는 것으로 끝났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불쾌하기보단 그저 두려웠다. 형들도 부모님처럼 사라져서 혼자 남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에 몸을 끌어안았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축축해진 시트와 옷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토스트를 입에 물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앉아 남은 음식을 먹으며 머리를 말렸다. 짧은 머리라 그런지 식사를 끝마쳤을 무렵에는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다 먹었으니 움직여볼까?”


식기들을 트레이에 옮겨 그대로 끌고 나갔다. 1층 식당에 도착하니, 도련님~하고 부르며 집사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생겼나? 트레이를 근처에 있던 메이드에게 부탁하고 집사장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걷고, 또 걸어서 저택에서 살았던 자신이 처음보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따라 간 곳에는 커다란 문이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 곳에는 역대 조상들의 얼굴이 맞이하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니 초상화뿐만이 아니라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들도 놓여 있었다. 보아하니 그 사람을 나타냈던 물건들을 같이 전시한 것 같았다. 호기심이 발동해 방 안을 둘러보는데 집사가 헛기침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제야 이곳에 온 목적이 궁금해졌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왜냐면 이곳이 만약 역대 가주와 그의 부인의 초상화와 물품이 있는 곳이라면 이곳에 없는 것이 있었으니까. 자기 생각이 적중했는지 집사는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자신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보통이라면 큰형이, 큰형이 바쁘다면 작은형이 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지금은 두 형이 모두 힘든 상태였다. 큰형은 일 때문에 바쁘고 작은 형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나마 괜찮은 내가 부모님의 물품을 정리하여 이곳에 초상화와 함께 보관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다행히 초상화는 생전에 그려놓은 것이 있어 그것을 놓기로 하였지만, 문제는 부모님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되물어 봤지만, 답은 없었다. 그래 이렇게 끙끙 앓으며 피하느니 차라리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나을테지란 생각에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일손이 비는 집사와 메이드를 불렀다.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부모님의 방과 집무실 등으로 나눠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일단 부모님의 방을 들려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형들과 찾아온 방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검을 배우면서 발걸음을 멈춘 곳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방보다는 어머니가 아끼시던 정원이나, 서재에서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며칠 사이 뽀얗게 먼지가 내린 방안을 보며 가슴이 저려왔다. 가만히 서 있으면,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어머니가 아끼던 보석함, 아버지가 아끼시던 술들, 그리고 어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일기장…. 주류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던 술만 전시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큰형에게 보냈다. 보석함은 통째로 보관하기로 하였고 일기장은 내가 따로 챙겼다.


 하나, 둘 저택 곳곳에 남겨진 부모님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추려낸 물건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방을 나섰다. 뒤따라오던 집사장이 말했다. 무리할 필요 없다고. 그 속에 품은 뜻을 잘 알기에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미소로 답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평소와 같이 소리를 내 웃어 보이고 싶어도 미소를 짓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괜찮지 않구나, 나. 풀리는 다리, 자꾸만 힘이 빠지는 신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흘리듯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방을 향해 달렸다. 다른 이들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푸른 빛이 도는 은백색의 아름다운 꽃

이 꽃은 처음 가문을 세운 조상께서 사랑했다는 여인이 묻힌 자리에서 피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슬피 우는 그가 안쓰러웠는지 새벽이슬을 머금고 핀 꽃은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저택으로 돌아가 일단 휴식을 취하자는 다른 이들의 말에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며 꽃잎이 상할까 조심스레 채집해온 꽃은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사라져버린 꽃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에게 찰나의 행복을 보여준 이 꽃에게 가문의 이름을 따 '홀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보는 자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이 꽃은 생김새도, 피어나는 장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이야기만 전해져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유모에게 자주 들었던 꽃의 전설은 어린 자신과 형들에게 호기심 대상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떠한 행복을 가져다줄까?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는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어른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라며 쓴웃음을 지으셨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기에 어른들도 아직 못 봤나 봐! 하고 넘겼지만 16살이 되던 해 왜 어른들이 그러셨는지 알게 되었다. 대가 없는 행복은 없는 법, 그래 언제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였다. 왜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항상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오랜만에 바쁘신 부모님과 형들이랑 외출하게 되었다. 가족에게 소홀히 해서 미안하다며 아버지가 시간을 내셔서 바닷가에 있는 별장에 놀러 가게 된 것이었다.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함께 놀러 간다는 사실 하나로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산책이나 할까…? 뒹굴거리던 몸을 일으켜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었다. 연못 가까이에 다다랐을 무렵, 달빛에 비쳐 은은하게 빛나는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기가 감도는, 달빛으로 인해 아름답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사라질듯한 분위기.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꽃이 이야기에만 나오던 그 꽃일 거라는 것을. 가져가 보았자 사라질 게 뻔했기에 제자리에서 소원을 빌었다. 행복한 여행길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별 탈 없이 다녀올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의 소원에 답이라도 하듯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꽃을 보고 작게 미소를 답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잠자리로 향하였다.


 꽃이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가족끼리 간 여행에서의 일정은 사고 없이 즐겁게 마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형들과 먼저 저택으로 돌아왔다. 잠시 들릴 곳만 들려 바로 따라오신다던 부모님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별일 아닐 것이 분명하니 기다려보자는 큰형의 말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형들도 걱정에 푹 잠을 자질 못했는지 수척한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식당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새하얗게 질려 달려오는 집사의 표정에 우리는 직감했다.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집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이제는 부모님과는 만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돌려 말하고 있지만, 그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작스러운 산사태가 마차를 덮쳐 그대로 파묻혔다고 한다. 주변의 인력들을 끌어다 흙을 파헤쳐 보니, 부모님은 안 계시고 부모님의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만 발견되었다고 말하였다.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살아계실 확률도 있다며 작은 형과 나는 열심히 부모님의 생사를 주장했다. 큰형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견에 동의하는지 재수색을 요청하였다. 끈질기게 물고 매달렸다. 우리는 아직 어리다. 앞으로 나아갈 길에서 부모님이 곁에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매달렸다. 돌아가셨을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였다. 그래, 그 강하던 부모님이 고작 산사태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결국, 수색 일주일 만에 흙투성이가 된 부모님을 찾을 수 있었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부모님의 모습에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죽음을…. 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사망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산사태로 인한 사고사가 두 분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 두 분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필요한 의식들을 잘라내고 이틀에 걸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몇몇 가문의 가주들과 지인들을 불러 간략하게 식을 치렀다. 뭐 간략하게 치른다고 하였지만, 알리진 않았어도 어디서 알고 온 건지 쥐새끼처럼 찾아온 방계혈족이 찾아와 식이 너무 단출하다, 형님이 위에서 화를 내시겠다, 이래서 어린 애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따위의 소음을 지껄였다. 쫓아내고, 쫓아내도 어디로 들어오는 것인지 결국 초대했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모든 이들을 저택에서 내보내고 나서야 겨우 조용해졌다. 어둠이 찾아올 새 없이 화목하고 웃음이 넘쳤던 예전과 달리 무거운 어둠이 지배하는 저택에는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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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 il crìmine (E)

2015. 7. 14. 23:21 | Posted by 아뮤엘

큰 형이... 입원할 정도의 부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떨리는 손을 이불 속으로 숨기고 토마스에게 자신이 준비할 동안 형이 어느 병원으로 갔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가 방을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일어나 욕실로 가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괜찮을 것이다. 제 형은. 강하니까. 제 애검을 붙잡고 토마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십 분쯤 흘렀을까? 토마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큰형은 어디에 있대?”

“상처가 꽤 심했는지 아직 혼수상태라고 하네요. 치료 후 바로 저택으로 옮겨졌다고 연락이 왔어요. 빨리 나으시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구만! 형 상태 좀 보고 올게~”

꼬맹이들 부탁한다라고 덧붙이며 괜찮은 척 평소의 자신을 떠올리며 “이글 홀든”을 연기하였다. 하여간 제 형이 다쳤다는데도 긴장감이 없다니까~, 가서 사고나 치지 말고 다녀와라! 등의 말에 대충 대답을 해주며 연합을 벗어났다. 아직 자신을 보는 눈은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은 척 평소의 발걸음으로 도시 외곽을 벗어날 때까지 걸어갔다. 외곽으로 나오자마자 감시하는 눈길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바로 저택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제 탓이었다. 연락이라도 할걸. 잘 지내고 있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그 한마디만 했어도...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제 상처를 숨기는 데 급급해서, 상대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지 못했다. 형은 강하니까. 자신과 달라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형이니까.


미친 사람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풍경이 바뀌고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디서 맡아 본 적이 있는... 낯익은 향기는 계속 코끝을 맴돌며 제 존재를 알아달라고 떼쓰는 것 같았다. 무슨 향기였지? 라벤더? 로즈마리? 무슨 향일까? 고민하며 뛰는데 녹빛으로 가득했던 눈앞이 조금씩 푸른빛이 은은하게 맴도는 은백색의 무언가로 인해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둘씩 늘어나 나무로 가득하던 숲은 어느새 사라지고 은색 꽃밭이 가득 채웠다.

“아....아아...”

이건 꿈이다. 그렇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외면하고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꽃들은 자신에게 소원을 빌라고 유혹하듯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났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악마들은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가?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라면 냉큼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른다. 부디 형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 대가에 대해서 뼈저리게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제 눈 앞에 펼쳐진 악마들을 검으로 베어내었다. 어느새 도착한 저택 앞에서 꽃가루로 물든 제 검을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은 변한 것이 없었다. 입이 가벼운 하녀들도, 시끄러운 친척이라는 작자들도. 자신을 알아본 집사에게 인사를 한 뒤 형의 상태에 대해 물어보았다. 등과 복부에 큰 검상을 입었는데, 상처가 큰 것도 있지만, 피를 많이 흘려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듣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형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링거이 꽂힌 잔 흉터가 가득한 팔을 내놓은 채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며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상체를 감싼 붕대와 창백한 얼굴.. 내가 형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조심스레 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형이 행복해지길 바랐는데. 이렇게 다쳐서 돌아오면 어떡해..응?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야속해 형의 볼을 꼬집기 위해 손을 올렸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여니 집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였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러워?"

“게오르그님이 오셨습니다.”

“건강하기도 하시지. 늙은 너구리”

제 친척 중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이였다. 호시탐탐 가주의 자리를 노리는 자였기에 형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하녀들 입단속 시키고, 친척이라는 인간들은 당장 다 내쫓아. 당분간 저택에 아무도 들이지 말고, 연합에 당분간 못 간다고 말 좀 전해주겠어?”

집사에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를 침대 앞에 놓고 앉았다. 밖에서 돼지가 멱따며 저항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형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일주일이 지났다. 형의 부재로 밀리는 업무는 내가 결제할 수 있는 것들만 일단 미리 처리하였다. 가문에 속한 주치의가 하루에 두세 번 들려 형의 상태를 검사했다. 상처는 많이 호전되었지만, 형은 잠든 채 깨어나지 않았다.

“형.. 이제 일어나주면 안돼?”

감긴 눈과 굳게 다문 입을 손으로 꾸욱 눌러봤지만, 미동도 없었다. 잠든 형이 들을 리 없다는 사실은 이글 저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주변에서는 이제 놓아주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자신은 형을 놓을 수 없었다. 이렇게 형을 보낼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아... 형이 보면 잔소리하겠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서랍에서 약을 꺼내 바르고 거즈로 덮어, 치료를 마무리하였다. 치료는 했지만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무료함에 잠이 든 형의 손을 가지고 장난치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사랑하는 형이 긴 잠에서 일어나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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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 il crìmine (9)

2015. 7. 3. 23:35 | Posted by 아뮤엘

"아찌 괜차나?"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조심스레 볼을 쓰다듬는다.

"아아..괜찮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몇 번의 시도 끝에 일어날 수 있었다. 불안해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카페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 사라져 가는 형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참았어, 이글 홀든'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이와 자주 들리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와 자주 오다 보니 점원이 알아보고 웃는 얼굴로 반겼다. 꼬맹이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하고 서비스로 받은 음료를 마시고 있자니 아이가 뚱한 얼굴로 쳐다봤다.

"꼬맹이 무슨 일 있냐?"

"엘리도 아찌꺼 먹고 시퍼!"

"이거? 꼬맹이가 마시기에 좀 그럴 텐데"

탄산이 들어있어 고민하는 사이 아이의 볼은 조금씩 부풀기 시작했다.

"아아.. 줄 테니까 볼의 바람은 빼는 게 어때, 아가씨?"

잘 정렬되어있는 물컵에 음료를 조금 따라 건네자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음료를 마신다.

"맛없쪄!!"

음료를 뱉어내는 아이의 모습에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우유를 건네주었다. 우유를 맛있게 마시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며 세팅해주었다. 어린이 세트라 그런가? 햄버그 위에 꽂힌 깃발을 보며 자랑하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 몫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반쯤 먹었을까? 딱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았다.


입 주변에 소스를 묻힌 채 먹는 모습을 보면 어릴 적 제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먹어라"

냅킨으로 아이의 입 주변을 닦아주자 나름대로 교양 있게 먹는다고 허리를 펴고 뻣뻣한 자세로 먹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그건 또 누구한테 배웠어?""틀비언냐가 일케 먹어야 어른이래쪄!"

'애한테 별걸 다 가르치네'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고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아이가 다 먹은 걸 확인하고 일어나 계산을 하고 연합으로 돌아가는 길, 과자가게에 들려 아이에게 과자를 안겨 주었다. 다행히 화난 건 풀렸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방방 뛰는 아이의 모습에 흐뭇하였다. 연합에 도착해 나이오비에게 아이를 맡기고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치고 정장을 벗었다. 오랜만에 입어서 그런지, 답답하다고 느껴졌다.

"피곤하네"

목욕을 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욕실에 들어가 욕조에 물을 채웠다. 욕조에 따뜻한 물이 어느 정도 찬 걸 확인한 뒤, 라벤더가 첨가된 입욕제를 풀고 욕조에 들어갔다. 은은한 라벤더 향에 심란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수척해 보이던 형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일까? 무엇 때문에?

자신이 집을 나와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형이 수척해졌다는 것에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존재가 형에게 아직 크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안돼..."

형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나온 게 아니었다. 행복하게, 형만의 삶을 살길 바라며 제 마음을 접고 나온 것이었는데... 어찌하면 좋을까? 물속에 얼굴을 반쯤 담그고 생각에 잠겼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따뜻했던 물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욕조에서 일어나자 차가운 공기가 자신을 맞이하였다. 춥다.. 따뜻한 물을 틀어 가볍게 샤워를 한 뒤, 물기를 닦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있었을 때는, 자신이 이러고 있으면 형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와서 깨우곤 했는데...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일들을 떠올랐다. 그리워해선 안 된다. 이젠 혼자 이겨가야 할 것들이니까. 형의 얼굴을 가까이서 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수척해진 형의 모습을 확인해서 그런 것인지 오늘따라 감정조절이 되지 않았다. 후회되었다. 그냥 내 욕심, 내 마음 다 외면하고 억누르면서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걸... 모르는 척, 집무실에서 일하다 잠든 형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형이 힘들어하는 날이면 같이 술을 마시고 그러다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그저 속으로 앓게 되겠지만, 그래도 형이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울지 않기 위해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시간이...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들도 사그라질 것인데.. 왜 이리 잊는 것이 힘들까. 베개를 끌어안고 억지로 잠을 청하였다. 마땅한 답 없는 감정들에, 혼자서 앓아봤자 상처만 입고 마니까..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어서인지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짜증이 났다. 겨우 몸을 일으켜 가운을 입고 문을 열자 다급한 표정을 한 토마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급한 임무는 사양이라구~"

"형,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 꼬마 아가씨가 문제라도 일으켰어?"

"다이무스씨가 임무 중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당해 입원 하셨다구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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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 il crìmine (8)

2015. 7. 1. 19:25 | Posted by 아뮤엘

꼬맹이와 케이크를 먹으러 다녀온 뒤, 책상에 앉아 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적어 내려갔다.

어떤 대답이 제일 홀든가 막내다운가...

꽤 여러 대답이 나왔으나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홀든 가의 막내는 어떤 인물이었지?

가볍고, 자유분방하며, 망나니스러운...

“나.. 어떻게 여태까지 버텨왔냐...”

연필을 굴려 이것저것 다른 답들을 나열해 놓는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최대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답안을 적어놓은 질문지를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꿈을 꾸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죄책감에 저택에서 나와 방황하던 시절의 꿈을..

어두워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어느새 굵어져 세찬 소나기가 되어 내렸다.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도착한 곳은 부모님의 묘였다.

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다.

죄송하다고, 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고..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익숙한 향과 뒷모습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형이 왜...이곳에?

“깨어있다는 거 다 안다, 이글”

“......”

“네 잘못이 아니다.”

무뚝뚝하지만, 그 속에 담긴 다정함을 알기에..

형의 등에 업힌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자신의 눈물이 비에 섞여 형이 깨닫지 못하길 바라면서


꿈에서 깨고 한동안 이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환기를 시킬 겸 창문을 열기 위해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자, 저 멀리 회사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다...”


그렇게 수 십분 정도를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라보기만 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기에 잠들기 전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질문지를 꺼내 각 질문에 대한 답을 외웠다.

완벽하게 외워야 했기에 수십 번도 더 읽고 이상한 것은 고치다 보니 벌써 저녁 무렵이 되어있었다.

내일 오전에 인터뷰가 있었기에 이르지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간단하게 씻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고 있으니, 저택에서 나온 지도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처음에는 한 달? 버티면 용하다고 생각했는데, 형을 잊기 위해 이곳에서의 삶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저택에서 나오면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었다.

자신의 삶에 형이라는 존재가 없이 자신이 살 수 있는가?

처음에는 형 없이도 혼자 버틸 수 있다고, 그리 생각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의 이들과 친해지고 그들의 일원이 되어 자리를 잡을수록 형이 그리워졌다.

잘 지내고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이렇게 하루하루를 그리워하고, 걱정하면서 저택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꼬맹이와 놀러 간다는 핑계로 회사 근처의 카페에 들려 형의 얼굴을 몰래 보았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보면 형에게 들킬까 봐, 강 건너 카페에서 형의 모습을 보는 게 다인지라..

멀리서 보이는 형을 바라보며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내가 없어도 형은 잘 지내고 있구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꼬맹이의 손을 잡고 연합으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멍하니 앉아있다, 잠을 잤다.

울고 싶었지만, 차마 울 수는 없었다.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을 가지고,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선을 넘은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고 도망쳐 나온 것은..

그러니 자신은 울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임무를 나가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반복하였다.

“바보 같네, 나”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은 내일의 일이 더 중요하니까...


이른 아침, 눈을 떠 샤워를 하고 나왔다.

얼마 전, 새로 산 정장을 입고 방 밖으로 나서자 문 옆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금발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뭐하냐 꼬맹이?”

“아찌 어제 엘리랑 안 놀아쪄”

“아.....”

어제 아이랑 공원에 놀러간다고 약속한 것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공원에 간다고 행복해하던 얼굴이 떠올라 더 죄책감이 들었다.

“ㅁ..미안하다 꼬맹아”

“흥! 엘리 몰라”

시계를 보니 슬슬 나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이렇게 두고 가기에는...

“미안한데, 꼬맹아. 오빠가 지금 일이 있어서 그런데 기다려 줄래?”

“....”

볼을 빵빵하게 불리고 이젠 쳐다보지도 않는 아이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그럼 꼬맹아, 오빠랑 같이 일하러 갔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쫑긋거리는 귀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도도한 척 팔을 벌리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공주님 가실 준비는 되셨습니까?”

“훙, 엘리는 맛있눈 거 아니면 안 먹오!”

“네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인터뷰를 하기로 한 장소는 형이 있는 회사 근처의 카페였다.

창가 쪽에 아이를 앉게 하고 그 옆에 앉자, 맞은편에 기자가 앉았다.

아이를 알아보았는지

“엘리양이랑 같이 놀러 다니신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었나 봐요”

“뭐, 우리 공주님이 워낙 활기차야지”

음료수를 홀짝이는 꼬맹이의 쓰다듬어주고 바로 본론에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이곳에 조금이라도 오래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질문지에 적혀있던 질문의 양은 그리 많더니, 정작 질문하는 것은 몇 안 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꼬마 공주님을 품에 안은 채, 카페 밖으로 나오는데 회사 밖으로 나오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놀란 마음에 카페에 다시 들어가 주저앉아 버렸다.

“아찌?”

“꼬맹아.. 잠시만....잠시만 가만히 있어 줄래?”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는지 얌전히 품 안에 안겨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꼬맹이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형의 모습을 조심스레 보았다.

건강할 거라고,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척해진 얼굴로 임무를 나가는 형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당장 형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형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다가갈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다가간다고 한들, 형은 나를 용서해줄까?

내 마음을 모르는 척 외면하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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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글] il crìmine(7)

2015. 6. 24. 23:43 | Posted by 아뮤엘

연합에서의 생활이 반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연속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나가자 자신의 얼굴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자신이 그 유명한 홀든 가의 자제라는 점과 회사가 아닌 연합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더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그런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쏟아지는 관심에 지쳐 가장 유명한 신문사의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다른 인터뷰들은 거절하였다.

인터뷰 날짜를 잡고 돌아오는 길, 인터뷰 질문내용이라며 전해준 종이에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였다.


Q,가문을 나온 계기는 무엇입니까?

Q.홀든 가는 회사를 돕기로 유명한데, 연합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Q.홀든 가에 대한 정보는 극비로 다루어지는데 가족사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골치가 아팠다.

형이 인터뷰를 매번 거절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장이 넘어가는 질문들은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졌다.

남의 가정사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충 대답해야겠네...”

질문지를 책상 위로 던져놓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평소 같으면 꽤 오랜 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을 자신인데...

최근 기자들과 가문에서 보낸 이들을 피하기 위해 이래저래 신경을 쓰다 보니, 신경이 곤두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문제였는지 저항할 틈도 없이 덮쳐오는 졸음에 어느새 잠이 들었다.


“.....찌”

....누군가가 자신을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글..아찌...”

“....안 꺼져?”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자신을 깨우는 손길을 쳐내고, 인기척이 있는 쪽으로 검을 겨누자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여자아이의 소리...?

그것도 익숙한...

“...꼬맹이?”

“흐...흐아앙”

구석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금발 머리의 소녀를 다급히 안아 들고 달래자 아이는 서러운지 쉽게 진정하지 못하였다.

“이글아찌가....흐앙...엘리에게..화내쪄”

“아냐, 꼬맹아. 아찌 안 화났어. 봐봐 웃고 있잖아?”

미소를 지으며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달래길 십 여분,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아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미안해, 많이 놀랐냐?”

“아찌가..엘리 손을 일케일케 쳐내고.. 무서운 얼굴 지어쪄”

최근 예민해져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너무 풀어져 있던 탓인지 몰라도 좋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자유 분망한 홀든 가의 망나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했기에 방금과 같은 행동은 여태까지 자신이 해온 것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맛있는 과자를 사줄 것을 약속하며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하자 아이는 알았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물어보자, 그냥 심심해서 놀러 왔다는 아이의 해맑은 대답에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방에서 내보냈다.

방 안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간단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책상 위의 질문지가 눈 안에 들어왔다.

어제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대충 대답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자라는 자들은 하이에나와 같아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 분명하였다.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자신이 여태까지 해온 것들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더욱더 견고하게 벽을 쌓아 올려야 했다.

인터뷰까지 남은 기간은 앞으로 3일..

3일 동안 모든 질문에 대해 홀든 가의 망나니 이글의 대답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되었다.

어색하지 않게, 의문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하지만 그것보다...

“우리 꼬마 아가씨와의 약속을 지키는 게 먼저겠지?”

붉게 물든 눈으로 방문 앞에서 쪼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가씨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방문을 여니 제 생각대로 쪼그린 채 노래를 부르는 꼬마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이, 꼬맹이. 오늘은 뭐 먹으러 갈까?”

“우웅.. 엘리는 오늘 케이크가 먹고 시퍼”

“그럼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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